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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상식을 덮치면 민중은 혁명을 꿈꾼다.
<발로 찾아 쓴 동학농민혁명> 조광환 지음
 
심범섭 시민기자   기사입력  2008/08/30 [15:23]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촛불이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렇지만 이게 웬일이냐! 머슴은 듣지 않았다. 귀를 막는다. 민주주의가 시장바닥에 나자빠져 뒹굴고 이내 조롱거리가 된다. 광우병 쇠고기가 시장을 덮친다. 법과 원칙이 민중의 상식을 덮치면 잠자던 민중의 마음은 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고갱이를 찾아 험난했던 혁명의 가시밭길을 걸어 보자.
 
황토현, 때는 1894년 지금으로부터 꼭114년 전, 현 정읍시덕천면이라고 했다. 전라감영의 장위영 군사 800에 보부상군 2,300을 합친 관군에 맞서 4,000의 농민군이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4월 초사흘이었다. 부안, 원평, 태인에 주둔한 농민군은 전라감영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주력부대를 부안으로 이동한 후 사흘 뒤 고부 도교산에 집결하여 백산에 이른다. 이를 본 관군은 태인의 화호나루에 진을 치고 백산을 향해 총알을 퍼 붓는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이곳 지형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는 농민군은 관군을 야트막한 황토재로 유인했으니..... 그리고 앞산 사시봉에 진을 치는 한편 배포가 크고 건장한 수십 명을 뽑아 보부상으로 가장하여 관군의 뒤를 따르게 한다. 마침 벌어진 관군회의는 선발을 서로 미루는 통에 위장한 농민군이 선발대가 되어 관군을 끌고 농민군을 치러 나선다. 다음날 때는 4월 7일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이었다.
 
관군으로 위장한 농민군을 따라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총 공격한다. 그러나 이미 농민군의 진지는 텅 비어있었다. 이 때 매복했던 농민군이 습격을 하니 관군은 혼비백산한다. 때를 놓칠세라 관군의 본진을 유린하니 농민군은 대승을 거둔다. 이것이 저 유명한 황토현대첩이다. 
 
그 후 연전 연승하지만 그러나 애석하다. 끝내 우리가 다 알다시피 동학농민전쟁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충청, 경상, 경기, 전라로 이어지며 차례로 무너져 내린다. 현대의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가세한 관군은 파죽지세로 농민군을 유린하고 만다. 그리고 우리의 위대한 전봉준 장군은 한 배신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된다.
 
전봉준 장군의 최후기록을 보자. "접전 후 일만 여명의 군병을 세어보니 살아 남은 자가 삼천이었고, 재 접전 후 세어보니 오백이었다."고 했다. 전투의 참상을 그대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는 전봉준 장군이 남긴 공초다. (조서, 국가보관문서) 그렇게 우리 역사를 넘어 세계역사에서조차 보기 드문 이 위대한 농민혁명은 미완으로 막을 내렸다.
 
이 순백한 농민의 꿈을 향하여 이 혁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또 다른 혁명가가 평해서 말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혁명은 단 두 번이다. 첫 번째는 동학혁명이고 두 번 째는 그 정신을 이어받은 5. 16혁명이다" 라고......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혁명을 짓밟는 자들조차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이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1963년 10월 3일 개천절 기념탑제막식에서 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연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할 것이 있다. 그 때 그 동학혁명의 시기와 어쩌면 그렇게 그 때로부터 114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의 역사환경과 빼 놓은 듯 똑 같으냐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 때 그들을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동학'이란 어줍잖은 급조논리를 창안케 했던 그 때의 역사환경이 어쩌면 그렇게 오늘의 역사환경과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기술과 지식 그리고 논리와 문물과 문화라는 서학에 맞서 그냥 맥없이 주저앉아야만 했던 그 무능한 조선정부의 관료들이 매관매직하는 데는 천재성을 발휘하다가 그런 무능을 탓하고 일어선 우리 농민을 향해선 일본과 중국 군대를 불러들여 토벌해 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그 때로부터 114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세계화의 물결이 우리를 총 공격하는 중에 이 땅의 정부는 외국군대를 불러들여 그 주둔비를 물어가면서 나라의 안녕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꼴이라던가 그래서 그들의 먹거리를 꼭 먹어야겠다고 우리의 시장을 조공으로 바친다거나 그들의 말과 제도에 무슨 오륀지니 뭐니 하면서 날 뛰는 꼴이 어쩌면 그 때와 그렇게 똑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 정부의 몇 배씩이나 되는 재산을 쌓아 놓고 있는 그들의 재주는 천재가 아니면 넘볼 수 없는 꼴이니..... 어쩌면 그렇게 동학혁명의 시기와 역사의 환경이 똑 같냐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발로 찾아다니며 쓴 이 이야기 '동학농민혁명'을 그래서 '소통하는 우리역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난해한 듯한 이 '역사소통'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니까 그 '소통'은 당시의 농민과 농민 즉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을 꿰뚫고 나가는 소통 즉 연대를 통해 '혁명'의 동력을 이끌어 내는 수평적 가치로서의 민주주의적 정신이었겠지만 그 뿐은 아니다. 그 때 그들이 죽창으로 찌르고자 했던 적들, 다시 말해서 나라의 왕과 관료와 선비와 반상 등 모든 인간과 인간의 소통임을 그들은 절절히 사무치게 외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 소통은 '대동'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이 대동을 통해 외세, 즉 서학을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 미완의 혁명을 우리에게 남겨 줌으로서 그들이 피로서 그리고 뼈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고갱이를 남겨주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소통'이라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향한 함성이었다면, 지금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시기를 사는 우리의 꿈은 경제 제국주의주의를 향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학혁명의 고갱이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의 투쟁에 나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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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8/30 [15:23]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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