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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된 일상, 그 '광기의 권력'을 폭파하라
사라밀스 작, 임경규 역 <현재의 역사가 미셸푸코>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08/12/20 [15:01]
 '미셸푸코' 라니 이 골치 덩어리를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하지만 평자도 묻고 싶다. '독자는 제정신인가?' 문명의 단 맛에 푹 빠져 있는 현대인의 일상은 정상인가? 또 묻겠다, 이 무한경쟁의 장바닥에 인간의 존엄은 있는가. 하나만 더 묻겠다. 그렇다면 지구촌에 인간은 존재하는가. 섭섭해하지 말라, 무한경쟁에 인간은 없다. 동물과 악마와 그들의 신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의 현실이라면 지나친 말인가.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
'현재의 역사가 푸코'의 말을 들어보자. '제도와 지식과 담론과 섹슈얼리티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 모든 것은 '훈육권력' 이다. 그리고 광기다. '광기의 훈육권력은 우리의 일상에서 작동한다.' 그것이 역사의 현재다. 그렇다.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오늘 우리가 작동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사실 지금 우리 모두가 광인이라는 걸 어느 한 사람이 있어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조금만 더 푸코의 말을 따라가 보자. 사물까지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담론의 권력에 의해 제러비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 즉 원형 감옥을 작동시키면서 감시자가 사라졌을 때 수감자는 공포에 의해 '감시와 처벌자의 의도와 의지를 내면으로 수용'하여 소위 '알아서 기는 피동체'로 전락한다. 즉 '인간주체'가 감시자에게 이전되고 '수감자의 의식과 몸'이 감시자의 권력이 작동되는 현장이 된다는 말이다. 이 광기의 훈육권력이 '일상'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면 '주체'는 감시자에게로 이전되고 수감자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권력의 주체인 감시자를 위해 작동하는 노예로 태어난다는 것, 이는 바로 자본주의 시스템 아닌가.
 
도대체 당신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존재한단 말인가. 인정하지 않겠지만 당신의 그 비열하고 한심한 일상의 복판에 푸코의 이 '담론의 덩어리'를 던지겠다. 왜? 이 모순과 갈등의 덩어리가 잠자고 있는 당신의 '인간주체'를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평자는 광인인가. 아니면, 평자의 오만이래도 좋다, 당신의 일상에 깃든 독성 읽기의 처방전을 발급하고자 한다. 그것이 마치 '이스마일 도끼를 들고 대평원을 건너 고도를 맞이하고자 했던 저 버지니아 공대 조승희의 비극적인 살인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그건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 지구촌의 모든 인간이 '고도를 기다리는 광인'일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익히 아는바 대로 푸코의 담론은 횡설수설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철저하게 몰아쳐서 부정하던 계몽주의를 어느 날 갑자기 계승하겠다고 떠드는 푸코에 대해 20세기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이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된, 담론의 덩어리'야 말로 <위대한 사상가만이 누릴 수 있는 '생산적 모순'이었고 또 '교훈적 모순'일 수 있다.>라고 지극히 아리송한 말을 한 바 있다. 글쎄, 그게 정말 그럴까. 일단 우리의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비록 문명이라는 찬란한 조명을 받고 있지만 그 모든 사물과 사람들과 지식과 담론의 틈바구니에는 갈등과 모순이 바퀴벌레처럼 기어다닌다. 그것은 자본을 따라가는 욕망이고 악마의 발자국이다. 그 갈등과 모순을 바라보노라면 푸코의 '담론덩어리'가 퍼뜩 떠오른다. 그리고 이내 "아, 바로 그거잖아!"라는 우리의 직감이 작동하는 걸 느낀다. 놀라움의 탄성, 푸코의 선견지명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조직 그리고 신과 악마 그리고 인간의 공격에 말 없이 당하고만 있는 자연과 그리고 인간을 위협하는 지구촌의 진정한 권력자 미생물이 얽히고 설킨 하나의 덩어리다. 그들은 생존하고자 다툰다. 거기에 말없는 구경꾼 우주 또한 절대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갈등과 모순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선과 악은 인간 중심이고 그 안에서 '우리'라는 단위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일 뿐이다.
 
권력에 저항했지만 유토피아를 거부했으며 구조주의를 희구했지만 그 중심을 해체하고자 했던 푸코, 그는 '신의 사망'을 선언했던 니체에 빗대어 '개인의 사망'을 선언하면서 '역사와 그리고 인간과 인간세상'에 대한 임상의학을 창안했고 그래서 '역사와 인간과 인간세상'에 대한 '생명과 질병과 죽음'을 거론하며, 이 '생명, 질병, 죽음'을 '성삼위일체'라고 선언하면서 이것을 '우리가 해야 할 기술이라'고 선언한바 있다. 이 거대담론에 이른 푸코의 고뇌를 생각할 때, 자본주의라는 악마에 사로잡힌 지구촌의 갈등과 모순을 진찰하는데 그를 초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또한, 읽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이 땅 대한민국을 습격하고 있는 광기야말로 '온갖 갈등과 모순의 담론덩어리'인 푸코의 진단법이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민족과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그 민주주의와 민족과 민중의 혼을 빼앗고 짓밟는 보수의 광기는 이제 생산의 단계를 지나 일상으로 투입될 준비를 끝낸 상태다. 더구나 이 광기가 세계의 보수화와 함께 등장한 광기이며 자본주의의 위기를 밟고 있다는 점에서 원형감옥의 광기로 등장할 날이 멀지 않다. 그 광기를 폭파할 책임을 잊어선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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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2/20 [15:01]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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