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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234호 아차산성 전경 ©디지털광진 |
기존의 통설에 의하면 唐의 蘇定方은 18만 水軍을 이끌고 西海의 德物島(현재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신라의 5만 대군은 지금의 경기도 利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南川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羅 唐의 백제정벌은 시작된다. 서해의 덕물도에 있는 소정방에게 신라의 태자 法敏(後, 문무왕)은 A.D.660년 6월 23일 찾아가서 만났다. 여기서 신라軍과 당水軍이 합의한 작전은 7월 10일 백제의 南(기벌포. 현재의 금강하구 남쪽변)에서 만나기로 한 그것이다.
태자 법민이 덕물도에서 남천주까지 돌아오는 데에는 뱃길만 하더라도 하루가 걸릴 것이다. 급히 신라군을 정비하여 출정시킨다고 하여도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다. 따라서 이틀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신라군은 남은 15일의 여정을 가지고 남천주(지금의 이천)에서 백제의 도성 부여를 비켜서 그 남쪽의 黃山伐까지 진격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시 서쪽으로 가서 금강하구의 남변인 伎伐浦를 점령하여 唐나라의 수군이 상륙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백제는 羅 唐의 침입을 미리 알고 방어전략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의 영토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신라의 5만 대군이 15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지금의 論山이라고 하는 황산벌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요행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신라는 백제에게 밀려서 낙동강까지 후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의 육로진격설은 검토되어야 한다.
황산벌 전투로 인하여 하루 늦게 기벌포에 도착한 신라軍의 선봉장 김문영(金文潁)은 상륙지를 먼저 점령한 唐軍의 노여움을 사서 참살 당할 뻔하였다. 이때 신라의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를 당군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였다. 지금까지 황산벌이라고 여겨왔던 논산과 금강하구의 남변인 기벌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삼국말기에도 대포 포차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戰禍의 파장은 피난민이나 패잔병에 의해서도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은 황산벌이 논산이 아닐 경우를 상정할 수 있겠다. 실재 황산의 지명들은 경기도 하남시의 황산, 전라북도 익산시의 황산, 경상북도 경주시의 황산 등이 있는 것처럼 고유한 지명이 아니다. 큰 강의 강변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지명으로써 지금의 고수부지이며 우리말의 둔치이다.
A.D. 668년, 신라는 北漢山城 (지금의 아차산성) 또는 그 남쪽의 漢城(지금의 천호동 일대)에서 20만 대군을 平壤으로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마무리지었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필자가 누누이 주장하여 온 한강하류의 북쪽의 구릉인 사적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 시굴조사보고서(2000)』에서 北 漢 山의 각 개 명문와편들이 채집된 사실에서도 뒷받침된다. 신라의 고구려정벌이 한강하류의 아차산성(前, 북한산성)에서 출정하였다면, 그 이전(A.D. 660) 백제정벌도 마찬가지로 한강하류의 아차산성에서 배를 타고 출정한 기습작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한강하류에서의 三國史의 제문제(1994)」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언급한 바가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완시켜 나아갈 수 있는 자료들이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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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는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절로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벌(지금의 논산 부근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화랑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하는 사찰이다. (서울시 홈페이지 관광정보) ©디지털광진 | 신라의 북한산성(지금의 아차산성)에서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한강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신라군이 비켜갔던 炭峴은 한강하구에도 있었다. 한강하구의 북변에 있는 SBS 탄현촬영소의 탄현의 지명을 영조 때의 『高揚郡邑誌』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러한 탄현을 비롯하여 일산신도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곳은 『삼국사기』지리지에서 皆伯縣이라고 한다. 皆(개) (계) 階(계)는 중국의 웨이드식 발음표기에서는 'chieh'이고, 병음발음표기에서는 'jie'로 표기되는 바 모두 같다. 신라는 당水軍과 마찬가지로 배를 이용하여 서해를 거쳐 기벌포에 상륙하는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한강하류의 위쪽 아차산성(前. 신라의 북한산성)에서 西海를 향하여 출발한 신라군을 한강하구의 북변인 황산벌에서 저지한 皆伯縣의 장군이 堦(階)伯將軍이다. 황산벌전투에서 김유신의 조카인 반굴 관창이 전사하였다. 태종무열왕은 『삼국유사』에 명기되어 있듯이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사돈 조카인 두 화랑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장의사를 창건하게 하였다. 이러한 장의사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지 않다. 서울 종로구 세검정초등학교 내에 있었다. 현재 장의사의 건물은 불에 타서 없어져 버렸고, 절의 깃발을 세웠던 「장의사지당간지주」가 보물 235호로 잘 보존되어 있다. 바로 황산벌전투가 한강하구에서 있었음을 증빙하는 불멸의 증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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