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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에 대하여
온달장군 전사지는 온달산성 아닌 아차산성.
 
홍진기   기사입력  2002/10/17 [20:48]

▲사적 234호 아차산성. 김민수 선생은 이곳에서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디지털광진

온달장군이 전사한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광진구민 대부분은 아차산성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충북 단양지역의 주민들은 단양의 온달산성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광진구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역사적 고증과 지리적 위치를 연구한 결과 온달장군의 전사지는 아차산성이 맞다는 내용의 글을「디지털 광진」에 보내왔다.

이와 함께 그동안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가 신라군을 맞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이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의 충남 논산군이 아닌 한강 하류 일산신도시 부근이고, 신라가 백제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신라의 북한산성이 현재의 아차산성이라는 내용의 글도 함께 보내 왔다.

특히 황산벌과 관련한 내용은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은 것으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으로,「디지털 광진」에서는 김민수 선생의 글을 원문 그대로 가감 없이 기재함을 밝힙니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에 대하여.

                                             김민수 (향토사학자)

▲아차산 대성암 남쪽 진달래샘 근방에 있는 온달장군 주먹바위.( 온달장군은 한강이북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출전하였으며 죽어서도 주먹을 굳게 쥔채 죽었다 한다. 맞은편에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바위도 있다.)     ©디지털광진
바보온달은 보잘것없는 처지에서 몸을 일으켜 고구려의 큰 장수가 되신 분입니다. 평강공주를 만나서 낮과 밤을 가려 무술과 학문을 익혀 나라에 큰공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서민들에게는 누구나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평강공주는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나선 용감한 여성입니다. 바보온달을 만나서 오순도순 숨어서 산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온달을 가르치고 떠받쳐서 고구려의 큰 벼슬(大兄)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평강공주는 후세 사람들에게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온달장군이 이곳 아차산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돌아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비보를 들으신 평강공주는 한 걸음에 평양에서 아차산까지 내달아 오셨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온달장군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저가 왔거늘 함께 돌아가십시다."라고 말하자, 온달장군의 관이 움직였습니다. 평강공주의 뜨거운 사랑이 온달장군의 관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렇듯 평강공주는 사랑이 넘치는 여성이셨습니다.

이러한 온달장군이 죽은 곳은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온달산성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급박한 전장터까지 평강공주가 내달아 올 수 있는 방법은, 배를 타고 서해로 내려와 한강으로 들어오는 길뿐입니다. 신라군들이 우글거리는 온달산성까지 가려면 한달도 더 걸릴 것입니다.

▲충청북도 댠양군 영춘면 하리의 사적 제264호온달산성.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 온달열전에서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온달산성이라 하였다 한다. (단양군 홈페이지)     ©디지털광진
고구려에는 우리민족의 영웅이신 광개토대왕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여기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을 여러 성(城)에서 뽑아온 사실들이 적혀 있습니다. 여러 성들은 한강 하류의 백제왕성(풍납토성)을 기준으로 하여 북쪽과 남쪽으로 갈랐습니다

북쪽에서 그 위치가 확인되는 성은 남소성·돈성·신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 성은 문헌기록에서 만주지경에 나타나는 성들입니다. 남쪽에 있는 성은 고모루성만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모루성은 충청북도 충주 지경의 고구려 비석에 나타나는 성입니다. 그래서 한강 하류(서울)를 기준으로 하여 북쪽과 남쪽에 있는 성들의 분류는 맞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 비석에서 아차(산)성은 한강하류의 북쪽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강상류 남쪽 멀리에 있는 온달산성은 아차산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지역의 아차산성에서 온달장군이 전사하였고,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 평강공주가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아차산성(사적 234호)]

아차산성은 산 능선의 윗 부분 약 1km를 돌아가면서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입니다. 높은 곳은 해발 200m가 조금 넘습니다. 서북쪽과 동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습니다. 대체로 북쪽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강을 넘으려는 고구려군을 막았던 성입니다.

아차산성의 성격을 밝히려는 시굴조사(2000년)에서 찾아낸 유물들은 모두 신라의 것들로 판명되었습니다. 특히 기와 조각에서 북(北)·한(漢)·산(山)의 글씨가 새겨진 것들이 있습니다.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일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A.D. 668년, 신라의 문무왕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20만 대군을 출정시킨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A.D. 660년에 신라의 백제 정벌은 어디에서 이루어 졌을까요.

▲장의사는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절로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산 부근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화랑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하는 사찰이다. (서울시 홈페이지 관광정보)     ©디지털광진
황산(벌)은 경기도 하남시, 전라북도 익산시, 경상북도 경주시 등 여러곳에 있습니다. 큰 강변의 벌판을 말합니다. 지금의 고수부지이며, 순수한 우리말로 둔치입니다.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신라군도 이곳 아차산성(옛, 북한산성)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서해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강 하구에 있는 일산 신도시의 백제때의 이름은 개백현(皆伯顯)이었습니다. 개백장군(階伯將軍)과 국어음에서 비슷하며, 중국의 발음표기에서는 아예 같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수군(水軍)을 한강 하구에서 막은 백제의 장군이 개백현의 계백장군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황산벌 전투에서 죽은 반굴·관창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서 장의사라는 절을 지었다는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장의사는 지금껏 황산벌로 알려진 충청남도 논산에 있지 않았고, 서울 종로구 세검정 초등학교에 있었습니다. 장의사의 절은 불에 타 없어지고, 절의 깃발을 세웠던 장의사지 당간지주가 보물 235호로 지정되어서 세검정 초등학교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맞는다면, 우리 광진구의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뤄낸 곳입니다.

 

김민수 선생은?

김민수 선생은 1989년 아차산에서 15개소의 고구려 보루성들을 발견함으로써 고대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1990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를 시작으로 하여 지난 10 여 년 간 한강과 아차산을 중심으로 고대 삼국시대 역사를 연구하여 활발한 논술활동을 펼쳐온 광진구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로, 2000년 향토사 연구논문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등 그 연구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발표논문.

『阿且山城의 再發見과 簡考』1990
『百濟의 慰禮城과 北漢山城』1993
『漢江流域에서의 三國史의 諸問題』1994
『漢水의 槪念과 高句麗 南平壤의 考察』1995
『百濟 建國過程의 諸問題』1996
『羅唐聯合軍의 百濟征伐 루트의 再檢討』1997
『古朝鮮의 始原과 變遷에 관한 硏究』1998
『峨嵯山에서의 古代史의 諸問題』2000
『漢四郡 初期 彊域에 관한 硏究』2001

수상경력
1988. 7. 올림픽 봉사상 수상 범민족 올림픽추진위원회
1994. 10. 향토사료연구논문 최우수상 수상 문화제육부장관상
1995. 10. 향토사료연구논문 우수상 수상 문화예술진흥원장상
1999. 6. 사료조사 공로상 국사편찬위원장상
2000. 12. 향토사연구논문 대상 수상 국무총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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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0/17 [20:48]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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