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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인간영혼을 위한 넋겆이 노래
김영석 시집 <거울 속 모래나라>
 
심범섭 시민기자   기사입력  2011/08/08 [15:27]
참으로 오랜만에 알이 꽉 찬 시집을 대한다. 그 동안 우리가 좀처럼 대해 보지 않던 장시라는 게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러나 낯설어 할 필요는 없다. 마음의 문간에 길손이 벗어 놓을 대뜰 하나만 준비해 놓으면 그만이다. 새로운 지평은 그 발길이 띄어지기 이전에 안으로부터 준비되는 게 아닐까. 준비만 된다면 낯선 발길의 불안은 오히려 긴장과 흥분이 더해져서 일상의 안일과 나태를 쓸어버리고 그 곳에 상상이 펼쳐내는 창조의 세계를 열어 놓기도 하지 않는가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시를 읽는 독자의 아량이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시 앞에 길고 긴 이야기 한 꼭지를 얹었다. 마치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이 있어야 제 맛이 나듯 그렇게 시 앞에 높은 문턱을 마련해서 독자가 그 문지방을 넘어야 시를 맛 볼 수 있게 했다. 맛있는 대추나 알밤을 따려면 장대를 들고 나무에 올라가서 수고를 해야 하듯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독한 침체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우리 시단에 이처럼 독특한 시 형식을 들고 나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관심을 증폭시키며 시단의 오랜 갈증을 풀어주는 시인이 여간 고맙지 않다는 생각이다. 문학평론가 이숭원이 잘 지적했듯이 '시적 사색과 거기에 더해 철학적 과제'를 담아내는데 '단형의 서정시'가 감당하기 곤란함을 알아차린 시인 김영석이 이야기와 노래를 합치시켜 새로운 시 형식을 시도한 것은 분명히 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인 '창조적 실험'이 아닐 수 없다. 격려를 보내주는 수준 높은 독자의 아량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거울 속 모래나라>의 시인 김영석은 이미 시단의 주목을 받아 온지 오래다. 그는 <썩지 않는 슬픔>, <나는 거기에 없었다>, <모든 돌은 한 때 새였다>, <외눈이 마을 그 짐승>등의 시집과 <도의 시학>, <한국현대시의 논리>, <도와 생태적 상상력> 등의 저서를 통해 하루가 다르게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뿌리와 영혼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문학담론의 지평을 열어가고자 했던 우리 시단의 중견이다.
 
그 연장선에서 탄생한 <거울 속 모래나라>는 그간 시인이 천착하고자 했던 종말론적 지평을 더욱 확장하고 그 확장의 세계에 파일을 박아 넣으며 더 깊은 곳으로 뚫고 내려가서 인간의 존재적 근원을 그 캄캄한 음계에서 죽음의 낱알로 변한 모래알로 발견하기에 이른다. 물질을 탐하는 인간의 영혼이 드디어 육체를 떠나 관념의 세계인 거울 속에서 관념의 유형화 현상인 물질로 치환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매사니와 게사니'에선 우리에게 당연히 따라 붙어야 할 그림자가 인간의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그림자 없는 인간과 그림자가 있는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며 공포에 휩싸이는가 하면 몸으로부터 이탈한 그림자가 집단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사태에 이르러 사회 전체가 공포에 휩싸이기도 한다.
 
'거울 속 모래나라'는 불과 시 열 두 편뿐이지만, 마치 파도이랑처럼 죽어서 떠도는 우리의 인문정신이 우리 안으로 밀려 들어와서 물거품으로 사라지곤 한다. 그 인문정신은 현실의 너머로 설정되는 하늘이나 땅속 또는 역사의 울안 안이기도 하고 더러는 뼈에 깃들기는 의문이라던가 이념 그리고 이상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인문정신을 담는 그릇은 늘 인간 생존의 극단으로 끌고 가서야 만나야 하는 죽음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가 살려내야 할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의미를 숙성시키고 있다. 생존의 주체인 나와 너의 몸과 그 몸에 깃들어 있어야 할 인간의 영혼을 분리하고 그 하나를 죽임으로써 그 죽음이 있는 공간에서 의미를 찾아 언어의 옷을 입히고 거기에 다시 언어의 절제와 깊이와 시적 구성력을 통해 시를 정제한다. 그간 시인이 숙성한 인생론적 고뇌가 죽음의 토양에서 시적 상상을 통해 그 죽음의 어둠을 뚫고 인문정신의 환한 빛으로 유감없이 떠오른다.
 
파헤쳐진 흙은 / 더욱 무겁고 고요하다
교과서에서 익힌 우리들 얄팍한 삽질로 / 더 파낼 수 없는 지리산
 
네 몸의 치수에 꼭 끼던 / 옷을 벗어버리고
네 팔다리의 자유를 주던 / 법을 버리고
네 흐린 눈의 초점을 지켜주던 / 깃발도 버리고
그러나 끝내 / 아무도 놓여날 수 없었던 모순의 꿈
네 뼈와 짝을 이룬 저 자유의 사슬
 
이제 사슬의 고요 그늘진 / 우리들의 손바닥 위에
남북을 지우며 눈이 내린다 / 아득히 내리는 눈발 너머
등 굽은 어머니의 한 사발 정한수에 / 지리산이 갈앉고
한 사발의 하늘 위로 소리 없이 떠가는 / 기러기 한 줄
그 투명한 끝을 / 어디선가 아버지가
한사코 잡아당기고 있다.
 
      <지리산에서>의 부분 (뒤 부분 운문만 발췌)
 
그래서 '두 개의 하늘'은 살아 있는 하늘이 아니라 죽은 하늘에서 자신의 영혼을 찾게 되지만, 반세기를 넘어 발견되는 '지리산에서'의 죽음은 아버지가 당기고 어머니가 살과 옷과 법과 깃발이라는 사슬의 그늘을 한 사발 정한수로 맑게 씻어낸 자유다. 그러나 '독백', '아무도 없느냐' 에서의 죽음은 민중이라는 바다에 이르러 자연으로 돌아가 막살이를 희망하는 삶의 회귀를 기획하는 자유다. '바람과 그늘' 그리고 '길에 갇혀서'는 너와 나 그리고 좌와 우라는 구분을 통해 인간이 겪어내는 말장난의 갈등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외눈이 마을'이나 '그 짐승'은 인간의 정신과 연사의 본질을 거스르는 인간의 간악함이 초래할지도 모를 재앙을 암시하고 경고한다.
 
시인이 이 모든 죽음을 통해 경고하는 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법과 제도와 이념과 조직에 의해 분리되면서 떠도는 인간의 영혼을 그 제자리인 몸에 복귀시키고자 하는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건 바로 인문정신의 대들보가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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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8/08 [15:27]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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