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참 혁명가에게 바치는 진혼곡 '아리랑'
김성동 지음 <현대사 아리랑>
 
심범섭 시민기자   기사입력  2011/03/25 [14:11]
떠도는 혁명가에게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헌사로 바쳐졌다. 어쩌면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 또 아름다운지…… 한을 품고 허공 중천을 떠도는 님들의 영혼이 모처럼이나마 환한 표정을 지을 것 만 같다. 진정 아리랑에 걸 맞는 문화의 변용이다. 아리랑, 그 게 어떤 노래이던가. 우리 강산의 구비를 돌고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며 삶의 절망과 한을 삭히며 희망을 빚고자 했던 우리 민중의 정서가 오롯이 담긴 정한이니 말이다.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비록 글 구성에서 그냥 ‘기록정리가 아니냐’는 반숙성의 의문이 있긴 하지만 <현대사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그 행적이 누벼 온 삶의 갈피와 사상의 갈피를 열어 뜨거운 기운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눈시울에 맺히는 이슬을 느껴야 했다. 아 그랬었구나! 우리가 누려온 삶의 안쪽에 조국강산의 또 다른 역사가 있었구나! 그 또 다른 역사를 즈려 밟았을 때 거기서 저며 나오는 아프고 찐한 감동에 이어 이 역사의 안 길로 향하는 이 오솔길이야말로 우리가 늘 그렇게 옳다고만 보아왔던 역사의 크고 넓은 바깥 길이 어느새 이 오솔길과 뒤바뀌어지는 인식의 착란에 직면하고야 만다.
 
그랬다. 우리 역사의 고비와 구비를 떠돌며 자신의 몸과 자신의 영혼을 그 구비와 고개와 질펀한 땅에 묻었다. 그리고 우리 역사의 강줄기를 흐르며 민중의 한과 어울려 아리랑이 되었다. ‘해방의 언덕배기를 오르고자’ 했던 박헌영, 김단야, 김삼용, 이주하, 이현상,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던 이준태, 김재봉, 정칠성, 그리고 ‘조선의 민중들아 들어 보아라’ 고 외던 여운형, 무정, 조봉암, ‘꽃잎처럼 떨어져 간’ 홍명희, 한설야, 이기영, 이동규, ‘함께 일해 함께 먹자’던 임화, 이용악, ‘지리산의 여장군’이라 불리던 이 땅의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등,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이 땅의 하나된 조국과 민중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오직 싸우고 싸우다가 그 끝 모르게 사랑하던 조국의 품안으로 돌아갔다. 작가는 그 님들을 신의 반열에 올려 허공을 떠도는 ‘중음신’이라 불렀다.
 
어찌 그들뿐이랴 만…… 작가 김성동이 아리랑을 헌사한 쉰 분 중에서 필자의 삶에서 눈길과 발길 그리고 귓전을 두드리고 전해왔던 서너 분의 무덤과 사상과 이념과 삶이라도 찾아보고자 한다. 아직도 님들의 체취는 우리의 삶 깊은 바닥을 흐르고 내가 살아 온 날들에 새겨진 님들의 발자국은 우리가 가야 길과 포개지며 우리의 삶을 지휘하고 있는 목소리가 아닐까
 
나는 가끔 가족과 함께 온달장군 묘역이 있는 아차산에 오른다. 서울의 동북부, 한강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유적 안내판을 따라 두어 시간 걷다 보면 어느새 망우리 공동묘지에 이른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수많은 애국열사의 묘가 잡초에 묻혀 있는 곳이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휘적휘적 걷다 보면 뜻밖의 놀람으로 깜짝 해후하는 묘비 하나와 맞서게 된다. 뉘라서 그냥 가랴 다들 고개를 떨어뜨리고 묵념으로 사죄의 마음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이의 묘비다. 바로 죽산 조봉암 선생이다. 대한민국 여명의 시기에 보수진영을 위협하자 이승만이 법의 칼로 선생의 목을 베었다. 아니 선생의 목이 아니라 진보목이고 민중의 목을 베어냈다는 말이 맞을 듯 하다. 지난 달 그 사법살인은 무효로 판가름났지만 그의 외침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회개조는 진보사상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에게 더 생생히 들려오는 외침이 있다. “민주적 평화통일 방식”과 “우리가 지향할 세상은 복지사회다.”
 
▲현대사 아리랑     © 디지털광진
아차산에서 바라보는 예봉산과 검단산은 야산 같지만 한강을 끼고 도는 한반도 대협곡의 큰   산이다. 두 팔을 활짝 벌려 남한강과 북한강을 끌어안으며 하나로 묶어내는 우리 강산의 장관이 눈앞으로 선 듯 다가온다. 눈길을 들어 멀리 다산 정약용의 생가를 지나 남북의 두 한강이 어우러지는 두물머리 위쪽으로 향하면 여운형의 고향 양수리가 빤히 보인다. 그는 일찍이 조선말로 ‘공산당 선언’을 번역한 사람이다. 1921년이었다. 그리고 손문과 조선의 해방문제를 논의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를 찾아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달라고 졸랐던 선각자다. 어린 날을 부친이 경영하는 서당에서 보낸 필자는 그 글방의 이야기판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있다. ‘이승만은 아니다.’ “오직 중도 통합만이 ‘민족의 주체’를 만들 수 있고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야 “민족의 자주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이뤄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외치던 여운형은 지금 필자가 살고 있는 양수리 인근 묘골에서 갈대와 잡초에 묻혀 찾는 이 없이 고요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1983년, 군사정권의 폭정이 절정을 향할 때다. 필자가 경영하는 인서점은 무슨 무슨 법임네 어쩌네 하면서 온갖 법망에 부대끼고 있었다. 충북의 한 산촌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로 그 곳이 이현상과 함께 빨치산 운동의 상징이었던 김상용이 태어난 ‘밤밭’ 이란 마을이었으니…… 이후 벌어진 일은 그냥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지만…… 나의 일상은 손바닥 금처럼 인근 보안대와 경찰이 다 읽어내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다행이랄까 그걸 보고해 주는 이가 나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 그 일일 보고를 필자와 거의 상의하다시피 했으니 상황은 훌쩍 역전이 되고……
 
하여간, 역사란 무엇인가 꼭 베틀로 짜듯 진보와 보수가 날 줄과 씨줄로 어우러져야 하는 듯 정당화되지만…… 그 선명한 역사의 복장은 단지 장식일 뿐 진실이 될 순 없다. 그건 승자가 짜 놓은 치장일 뿐이다. 그 안쪽의 길로 나 있는 깊은 지평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주시해야 한다. *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1/03/25 [14:11]   ⓒ 디지털광진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