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들'의 춤사위
조정래 소설 '허수아비춤'
 
심범섭 시민기자   기사입력  2010/12/16 [17:28]
일찍이 재물과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마천은 나보다 '열 배를 더 가지면 헐뜯고, 백 배를 더 가지면 두렵고, 천 배면 고용되고, 만 배면 노예가 된다.'고 했다. 그로부터 수 천 년이 지난 오늘 이 사마천의 경고를 경고가 아닌 경전으로 삼은 종교가 지금 우리 사회에 범람하고 있으니 이게 대체 웬일인가! 그게 우리 대한민국의 '상류사회'라니 꺼질 듯 한숨이 나온다. 그저 무슨 도리라는 막연한 법을 따라 꾸벅꾸벅 살아가는 우리들이야 그냥 구경만 하면 될 듯싶지만 그래도 이 땅에 사람이 있어서 이 골머리 아픈 신흥종교에 눈길을 보낸 이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그가 들이미는 내시경은 이 신흥종교의 머리 속뿐만 아니라 아가리에서 똥구멍까지 들어가 샅샅이 관찰하고 그걸 사진으로 찍듯 읽어내고 있다. 뿐인가 조금은 엉성하지만 이제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지간히 끝났으니 '경제민주주의란 걸 해야 한다.'는 처방전까지 내놓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가 누구인가 태백산맥에서 발원하고 한강줄기를 타고 배를 저으며 아리랑가락을 부르던 작가 조정래다. 그가 드디어 인적이 드문 역사의 땅을 벗어나 현실로 발을 내 딛고 있다.

상류사회는 비단으로 가려진 장막의 안이다. 해가 솟아오르는 저 동쪽 하늘 너머의 신비 그리고 해가 진 뒤 달이 뜨고 별이 돋는 신비의 성소다. 그래서 일께다. 동양철학은 그 빛과 어둠이 생성되고 그 빛과 그늘 곧 음양으로 세상을 지어내서 경영하는 신성의 땅을 성리학이라는 말의 지팡이로 찾아내고 짐작했을 뿐이다.

비록 정치의 시대는 흘러간 물이어서 연자방아를 돌리지 못한다지만, 그래서 87년 6월의 민주화 이후 정치의 시대는 가고 이를 황금만능의 시대로 대체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여전히 돈으로 돌아가는 저 태극의 신비가 권력에 의해서 돌아가는지 돈에 의해서 돌아가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냥 그 놈이 그 놈 같아서 그냥 이름만 바뀐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만 있었는데 다행인지 그 새로운 양기와 음기가 뒤섞이는 태극의 지점, 그 하늘과 땅이 몸을 섞고 뒤틀며 운'과 '명'을 생성해서 오늘의 우리 삶과 역사를 움직이는 신성의 땅을 환하게 비춰주는 이 이야기는 잔뜩 목말라 있는 우리의 목을 축여주기에 충분하다.
 
 -'경제민주주의'라는 조정래식 처방- 
정치판을 돈 판으로 대체한 권력의 동네는 여전히 약육강식의 기운으로 들 끓는다. 거기서 선과 악은 단지 빛과 그림자 음과 양일 뿐 인간의 일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 태극의 양상은 분명 새로운 세상의 조짐이겠지만 여전히 과거를 추억하며 희망의 꿈을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라는 역사에 실어야 하는 우리 하류를 사는 사람들은 그 역사의 경계에서 저것들이 혹 악마는 아닐까 그리고 다가 올 날들이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마지막 단계인 지옥의 세상은 아닐까 두렵기만 하다. 

박재우는 소위 명문대를 나와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다. 그는 이 상류사회의 상징이다. 박재우의 말을 들어보자. '돈은 귀신도 부린다.' '돈은 살아 있는 신이다.' '돈은 전지전능하다.' 박재우와 함께 돈의 권력을 생성하는 남회장이나 강기준 그리고 윤성훈은 이 21세기의 신흥종교에 푹 빠진 광신도다. 그들에게 '인간의 가치'는 단지 인간을 낚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끼로 도덕과 감동과 사랑을 기획하고 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배터리에 불과해서 수명이 다하는 순간 폐기되는 소모품의 존재다. 이 상류사회의 존재는 단지 인간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들의 욕망과 감각은 다위니즘적 약육강식이다. 그들의 야만과 잔인한 행동은 단지 수컷동물의 본능일 뿐이다. 그들은 춤사위는 허수아비의 몸짓일 뿐이다.
 
  -'늪에 빠진 사람'을 늪에 있는 사람이 구한다? -  
사실, 이 소설 '허수아비춤'은 조정래라는 작가의 유명성을 빼 놓고 말 할 수 없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문학의 대가다. 그래선지 그는 자신의 좌표와 그 좌표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욕심을 감추지 않고 활짝 들어내서 말한다. '진정한 작가이길 원하거든 민중보다 반 발만 앞서가라, 단 한 발은 민중 속에 붙여놓고 있어야 한다.' 톨스토이가 한 말이다. 또 빅토르위고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작가라고 했다. 한편 수년 전 조정래가 '인간연습'을 내 놓았을 때의 실망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작가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란 정약용의 글까지 인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다시 지적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대한 대안제시에서 작가 현기영의 '누란'이 청년성에 호소하는 문화적 저항을 제시한 데 비하여 조정래가 '경제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조정래에게 인식의 더 큰 틀 거리가 필요함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늪에 빠진 사람을 늪에 있는 사람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경제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닦아줘야 가능하기 않겠는가.

끝으로 여담 한 조각을 남기고자 한다. 1982년 5월 12일이었다. 서울 건국대학교 앞에 한 서점이 문을 열면서 그 서점의 간판에 한 줄의 글을 써넣었고 이 글이 지나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인간은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다' 라고 말이다. 꼭 28년 전이다. 이 서점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과학서점 <문화사랑방 인서점>이다. 그래선지 청년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사상적 신대륙은 동시에 '인민서점'에서 '민'자를 뺀 것이라며 경찰의 추궁을 받기도 했었다.  *
 
▲ 조정래 작 '허수아비춤'     ©디지털광진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0/12/16 [17:28]   ⓒ 디지털광진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