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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고구려유적'아차산일대 보루군'
[기고]향토사학자 김민수, 아차산 고구려보루 유적의 의미에 대해
 
향토사학자 김민수
 
 이 글은 광진구의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운영하는 코리아브랜드넷>  KNOW>  전통문화&자연에 기고한 글로 디지털광진에 중복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발굴과정
 
▲ 아차산 홍련봉 제1보루 발굴전경(사진 고려대.2007)     © 디지털광진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 유적들은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형태 규모 거리 등이 개략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 광진구 내의 화양지구를 개발할 1978년 즈음에 이러한 유적들이 모두 소실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후 1989년, 아차산에 불이 났을 때 비로소 묻혀 있던 고구려 보루 유적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진화작업 중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돌무지들과 그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마다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넓은 구덩이들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것이 곧 지금의 장성(長城)과 작은 성(城)들인 보루들이었다.

 돌로 쌓은 장성은 아차산 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한번 감쌌다. 그리고 그 북쪽의 용마산과 망우산의 능선을 따라 또다시 반달 모양으로 두 번째 감쌌다. 한강하류의 위쪽 북변(北邊)을 두 겹으로 감싼 것이다. 그 사이에 대략 500m의 간격을 두고 20여 개의 보루들이 산봉우리의 지형에 맞게 석성(石城)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발굴 당시만 해도 많은 학자들은 아차산 일대에 이렇게 많은 보루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결국 2000년, 아차산 제4보루를 발굴한 결과 고구려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이어 시루봉 보루, 홍련봉 보루, 아차산 제3보루, 용마산 제2보루들을 연이어 발굴한 결과 모두 고구려의 보루로 확인됐다.

 
사적 제455호인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현황  
▲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 현황도(사진 광진구. 색은 산의 표시)     © 디지털광진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은 모두 돌로 쌓은 석성이다. 쌓는 방법에서 고구려 양식의 여러 가지 수법들을 엿볼 수 있다. 성벽을 두룬 곳곳에 장방형으로 툭 튀어 나오게 쌓은 치성은 고구려 성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릇에서도 고구려토기의 대표적인 유형인 입이 벌어진 나팔입항아리와 발리 셋 달린 원통형세발토기의 파편들을 여러 채집하였다. 특히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後部0兄'의 글자가 새겨진 그릇 조각을 발견했다. 후부는 고구려의 5부제의 하나다. '0兄'은 고구려 관등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고구려의 성곽들이다.
 
남한에서 처음 확인된 한강하류 유역 아차산 일대에 분포한 고구려 보루는 2004년 10월 27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명칭으로 사적 제 455호로 지정되었다. 아차산 능선에 7개소(홍련봉 2개소 포함), 용마산 능선에 7개소, 망우산 능선에 2개소로 총 16개소가 지정되었다. 지정 받지 못한 것과 소실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30여개소의 보루가 아차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고구려가 한강의 목인 아차산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 일람표(서울대. 2009년)


아차산 고구려보루 유적의 의미  
 이때까지만 해도 백제 고구려 신라의 역사 중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소외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공간이 대부분 북한과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증표였다. 광개토왕의 비석에서 아리수(한강)을 건너 백제를 굴복시킨 사실이 생생히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의 아들 장수왕은 아예 한강 유역의 백제를 토멸시켰다. 하여 도망가는 백제의 개로왕을 잡아와서 아차성 아래에서 참살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백제는 충청남도 공주로 도읍을 옮겼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확인한 학자들은 흥분했다. 세 나라의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여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고구려의 영역은 한반도는 물론 만주 벌판 모두를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의 동북3성(요녕 길림 흑룡강)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고구려의 옛 영역은 북한과 중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나누어 가지고 있다. 하여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유네스코 산하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시키는 과정에서 각기 따로 신청하게 된다. 중국은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고구려왕성, 왕릉급귀족묘장'이라는 명칭으로 신청했다. 이는 2004년 7월 1일 오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고분군' 역시 2004년 7월 1일 오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하나의 고구려의 문화유산이 북한과 중국으로 찢어지는 아픔을 감수하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아픔을 딛고 광개토왕의 기상으로 일어설 수 있는 곳이 아차산이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들의 소리없는 함성은 오늘도 도도히 한강을 따라 서해로 퍼져 나가고 있다.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은?
▲ 김민수    © 디지털광진
아차산에서 고구려의 보루성들을 처음 발견하고서, 향토사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아차산에 관계된 자료들과 고대 역사를 재조명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전국향토사연구논문 공모에서 두 차례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사료조사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기사입력: 2010/10/14 [12:33]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광진구의 보배 입니다. 초동 10/10/18 [13:43] 수정 삭제
  산불을 끄다가 고구려의 보루성을 발견하고 아차산과 함께 숨을 쉬고 느낌을 나누는
김민수 향토학자님게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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