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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와 '서양 철학'의 풋사랑
강신주 지음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동녘출판사
 
디지털광진
 
거울 앞에 서면 또 하나의 세계가 나타나고, 그 새로운 공간에서 나는 ‘나를 응시하는 나’를 맞이한다. 그는 누구일까, ‘나’이면서 ‘너’다. 그렇게 ‘시와 철학’이 만났다. 뿐인가 풋풋한 사랑에 빠진다. 시는 풋 색시다. 정 많고 예쁘고 맘씨가 고와서 꼭 우리의 고향에서 막 올라온 숫처녀만 같다. 왜 아니랴, 역시 총각녀석은 말썽꾸러기다. 엉뚱하게도 양코배기다. 그래도 년 놈만은 좋단다. 촌색시 좀 봐라, 정보다는 힘 좋고 권세 있고 정의와 논리로 무장한 총각 무사가 그렇게도 좋단다. 그래서 둘은 하나가 금새 하나가 되고 만다. 하나가 거울로 들어가면 하나는 거울 밖으로 나와서 숨바꼭질을 하며 논다. 사랑을 나눈다. 우리의 시와 서양의 철학이 아니 우리의 시인과 서양의 철학자가 그렇게 정과 논리로 거울의 안팎을 오가며 이야기하고 씨름을 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풋색시 같은 우리의 시가 이상의 공간에 발을 텀벙 담그고 ‘행복하지 않느냐고 좋아하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철학이 ‘옳거니 좋다’고 답한다.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그래서 시도 몸을 풀고 철학도 몸을 풀어 신방은 사랑싸움에 녹아 내린다. 그걸 보노라면 어느새 우리도 그들의 속내에 꼭꼭 숨겨놨던 젊은 날의 풋정을 다 들어내어 구름처럼 개울물처럼 풀어놓지 않을 수 없다. 시와 철학이 손을 꼭 잡고 이상과 현실을 오가며 몸을 섞고 마음을 섞으며 사랑을 나누니 그걸 어디 보고만 있겠는가 말이다. 시도 철학도 봄눈처럼 녹아서 대지를 적시며 우리의 마음 안으로 흘러 든다. 당신 곁으로만 흐르던 도종환의 접시꽃은 그래서 우리의 마음 밭을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다가 어! 이게 웬일이랴! 갑자기 우뚝 서서 생명을 잃고 ‘가구’처럼 저만치 물체로 눕는다. ‘아! 그려! 종환이가 상처를 하고 재혼을 했다지! 음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런가 하면 어느새 우리는 ‘우산을 쓰고 / 은행나무 밑에서 / 그대를 기다리던 우리는 강물이 된다. 그리고 어느새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아 바다로 나아가 ‘우주가 된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다시 무한을 떠나 은행나무 밑으로 돌아와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는 하나의 빗방울로 태어나 ‘무한을 맴도는’ 레비나스와 원재훈을 만난다. 시에 양념을 치고 양념을 치는 요리사에게 시가 사랑을 주니 궁합은 저절로 맞아 떨어진다.
 
그런가 하면,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나’는 김남주를 따라가 ‘개가 된다’ 부시네 집 푸들처럼 말이다. 저자는 남주가 푸코보다 먼저라고 했지만, 푸코가 외친다. “너는 타인이 부여한 규칙에 복종함으로써 ‘노예적 주체’로 태어난 ‘개’일 뿐이다.” 라고 악담은 던지고 조소를 퍼 붓는다. 허기야 맞는 말이다. 권력은 청와대나 국회나 관공서 또는 이런 저런 조직에서만 작동하는 거라고 그 동안 우리는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래서 푸코는 더더욱 화가 치미는가 보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미시적 권력’이 우리의 의식을 ‘노예로 제작하는 장치’임을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자유는 개의 복종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 그 걸 ‘무사유’라 했다. 그 무사유의 위태로움을 경고한 한나 아렌트의 말은 참으로 을씨년스럽기만 하고 으스스하다. 아렌트가 유태인의 학살주범 아이히만에 대해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한 이웃아저씨일 뿐이다.’라고 한 잡지에 평하자, 세계의 유태인은 발칵 뒤집혔다. “뭐야! 천인이 공노해도 모자라거늘! 이 악마이거나 괴물이 분명한 아이히만을 두고 ‘그저 평범한 이웃아저씨’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말이냐?’ 다시 아렌트의 말을 들어 보자.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랐을 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이나 악이나 더구나 그가 행한 인종청소에 의해 죽어가는 유태인의 고통이라던가 슬픔이라던가 비극에 대해서 그리고 유태인의 죽음과 생존에 대해서 그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즉 ‘무사유’가 다시 말해서 아이히만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이라는 것이 있고 인간이라면 그것을 작동해야 한다는 것조차 아이히만은 몰랐기 때문에 그는 그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아주 ‘평범한 우리의 이웃집아저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그런 아이히만과 무엇이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이미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의 시인 김남주가 생애를 다 한꺼번에 토해내 듯 외치던 그 절규를 들어보자. 그는 ‘어떤 관료’에서 ‘근면, 정직, 성실, 공정, 충성, 봉사'라는 관료의 덕목을 두루 다 갖춘 훌륭한 관료를 향해 ‘너는 개다’, ‘주인이 누군지’ 음 그렇지 박정희인지 전두환인지 일본천황인지 아니면 미국인지조차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너는 개다’라고 말이다. 왜? 이런 관료는 ‘아프리카의 식인종으로 주인이 바뀌었을지라도 계속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관리생활을 했을 거다.’라고 조롱한다. 그렇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우리의 관료가 무사유를 요구받고 인식의 노예로 태어나는 때다. 유명환 외무장관의 딸이 어떤 복종에 의해 맞춤식으로 특채되는 데서 그리고 용산참사를 지켜보면서 각종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의 관료가 개로 전락하고 있다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은가. 김남주의 말이 가슴으로 절절하게 저며 든다. 그게 우리의 일상이라면 ‘나는 과연 이 사태에서 안전한가 우리의 고개는 절레절레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람인가 개인가?’
 
꽤 지났지만 한 때 시집은 베스트셀러 목록의 앞자리 몇을 꿰찬 적이 있었다. 이어서였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 무렵쯤일 게다. 철학 책도 질세라 인문학 반열을 뛰어넘어 서적코너의 앞자리까지 뛰어 오르는 기세를 올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때의 그 인문학적 열정과 힘이 바로 87년 6월의 민주혁명을 가져왔고 광화문의 명박산성 앞에서 백만의 촛불을 들게 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추억만으로 간직해선 안 된다.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을 보존하려는 힘 그 ‘코나투스’가 살아나와야 한다. 시와 철학이 다시 일어나 역사와 현실을 읽어 주고 우리의 꿈을 노래해야 한다. *
 
▲     ©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0/09/20 [19:12]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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