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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님들! 사약을 받으시라
노무현이 꿈꾼 나라 = 이정우 외 38인 지음
 
심범섭 시민기자
 
올 봄은 꽤나 짓궂다. 6,2 지방선거가 코 앞이다. 삶의 일상이 온통 덧셈으로 출렁거린다. 그러나 봄도 어느새 갈 채빈데 우리는 절망과 희망의 쌍알로 이 봄을 맞고 있다. 희망연대였던가 해일처럼 다가 올 것 같은 4+5가 역사의 해안에 은물결로 이는데 수상한 파고가 해일로 다가온다. 그 요동치는 바다에 이 높은 해일은 우리의 덧셈을 덮치는 뺄셈이 되고 말 것이다. 바다는 넓고 깊어서 우리의 안목은 이르지 못한다. 하필 연평도라니… 저 옛날 한 봉사의 따님이 아버지의 광명천지를 꿈꾸며 홀연히 몸을 던진 인당수가 아니더냐, 그러나 늘 그랬지만 우리의 추측은 빗나가는 법, 화사한 연꽃 잎사귀를 헤치고 올라오는 한 효녀는 우리의 절망이다. 그물을 뒤집어쓰고 위용을 자랑하며 물 밖으로 나오는 건 그물에 씌워진 어떤 흉계만 같다. 인당수는 저 깊은 바다의 내면처럼 어둡고 무거운 기운으로 우리 역사의 희망을 토막 내어 두 동강으로 뱉어놓는다. 잃어버린 10년의 한이 화사하게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그 희망과 절망의 하늘에 그렇게 흉흉한 중에 떠난 군인과 어부들은 가족의 통곡만큼 영원한 안식을 찾아야 하리라.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아아 이제 하늘조차 우리를 버리는구나! 우리는 이미 지난해 5월 저들의 한 서린 ‘잃어버린 10년’ 독기에 처절하게 울었다. 어느새 찔레꽃이 만발하던 5월의 스무 사흘이 내일 모래다. 사실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은 그 잃어버린 십 년 한의 독기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란 생각이다. 이제 또 무슨 재앙이 닥칠지 두렵다. 현재의 권력이 잘 가라고 막 작별한 보낸 권력을 참살했다는 점에서 노무현의 죽음은 분명 단종애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뿐인가 타락한 세상과 인간의 운명을 십자가에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죽음을 통해 부활했던 예수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그의 죽음에 하늘이 울었고 땅이 울었고 사람들은 목메어 울었다. 이제 그는 신화일 수 밖에 없지만 이야기는 강산을 수놓는다.  

많은 이야기가 떠돌고 책이 된다. 그의 곁을 지켰던 서른 여덟 명이 그의 꿈길에 충언을 묶어 받혔다. 글쎄 현대판 생육신 쯤일까 님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깔고 그 위에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생각과 철학과 이념과 정책을 조국의 산하가 가득 차도록 펼쳐 놓는다. 철학과 사상과 정의와 사랑과 정책이 조국이 가야 할 세상에 질펀하다. 생육신의 켜켜이 쌓인 님을 향한 마음이 울림으로 다가와 읽는 이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봉하 순례 길에 나서게 할 듯 마음을 저미며 파고든다.  

엄습하는 ‘잃어버린 10년’의 한  

노무현이 그렇게 가고 싶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의 그림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 길에서 우리가 나눠야 할 인문학적 화두가 우리의 귓전을 쟁쟁하게 때린다. 대한민국의 균형발전을 위해 절실한 ‘수도 이전’의 문제라던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분수에 넘는 복지보다 ‘우선, 경쟁과 복지를 함께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는 노무현의 현실론이 폐부로 들어 온다. 우리에게 늘 서운하게만 여겨졌던 노동정책은 ‘양극화’ 되는 신자유주의 현실 앞에서 ‘진보적 노동정책’ 이라는 이름으로 이상과 현실을 비겁하게 절충했음을 고백하는 이야기며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대연정을 제안해서 주변 모두에게 실망을 주었던 부끄러운 이야기, 그리고 서민감세, 시민주권, 민주주의, 진보, 인간, 지구환경 문제 등 그가 자신의 꿈길을 향해 가면서 밟아야 할 모든 화두가 등장해서 살아 있는 생육신들이 질문하고 답하고 토론한다.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문학 담론이 강물처럼 흐른다. 쏟아져 나오는 노무현 서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시대의 탁월한 논객이 총 동원된 이 담론에서 노무현의 꿈이자 충신들의 갈 길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분명하게 정리해서 ‘이 땅의 진보’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의 진보가 20세기 냉전의 유산인 분단조국이라는 현실을 안고 가면서 충돌 할 수 밖에 없는 자유, 평등, 민주주의, 통일 그리고 성장과 복지 등의 문제를 나라 밖의 외재적가치의 보수와 진보 그리고 나라 안의 내재적가치의 보수와 진보로 구분해서 인류 공동체라는 지구촌화의 과정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공간에서 우리의 평등과 평화와 경제성장과 발전을 조화시켜 무리하지 않게 우리의 진보의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때 우리의 대중을 이 문제의 중심이 놓고 진보를 구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의 시대와 보수가 거론되고 진보의 시대와 시민사회가 진보로 거론된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은 늘 절충하지만 그 절충안에서 정책과 전략은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홍구, 정해구, 조희연, 김창호, 이병천, 김용익, 이종석, 성경륭, 장하준 등 학계를 망라한 서른 여덟 명의 열띤 토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슬펐다. 외람되지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 옳아요… 그렇지만’이다. 왤까, 그 모든 담론에 노무현이 요구한 것은 덧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님이 살아 있을 때도 그랬지만 그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뺄셈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참담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노무현을 살해한 일당중의 하나라는 걸 모르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노무현의 꿈길과는 반대로 노무현이 가고 있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 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진보의 여전한 ‘뺄셈의 담론’ 
진보는 순리를 따르는 이치다. 도전하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우러지는 것이다. 인간의 이치를 자연에 접목하고 자연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며 또한 자연으로 돌아감이다. 그래서 힘으로 대상을 굴복시키는 보수와 달리 진보는 인간의 아름다운 사랑과 정과 따듯함으로 세워내는 모성적 가치의 원리다. 흐르는 물결처럼 아래로 흘러 내려가면서 서로의 손을 잡아 하나되는 강물처럼 낮은 곳으로 향하며 어우러지는 세상이어야 한다. 그게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서는 민주주의다.  

그러나 우리는 87년 이후 과학적 인식을 한답시고 관념론의 건너편에서 유물론이란 어줍잖은 과학으로 현상의 본질과 세계의 근원과 사물의 본질과 나아가 인간의 본질을 알아내야겠다면서 현상의 이치를 찾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갈라지고 흩어지고 찢어지면서 뺄셈으로 일관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동지는 적이 되었고 우리는 각각이 되었다.  

나무를 보라. 싱싱하지 않은가 이파리와 줄기와 뿌리가 하나로 어울려 있음이다. 현상의 본질을 건드려선 안 된다. 뿌리를 만져선 안 된다. 생명을 해체하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것은 간단하다. 나쁜 것과 좋은 것, 나쁜 세상과 좋은 세상이다. 힘으로 건설하려는 세상과 사랑으로 어울리고자 하는 세상 그것이 보수와 진보다. 간단하게 구분하고 더 이상 쪼개지 말라. 제발 가르기를 멈춰라. 밑으로 흐르며 손을 잡으면 된다.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조희연님 조차 ‘각 진보 진영이 각축을 벌려야 한다.’니, 아직도 저들의 웃음이 보이지 않는가. *
 
▲  노무현이 꿈꾼나라   ©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0/05/27 [22:12]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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