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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의 박꽃과 수세미외꽃
[광진이야기]향토사학자 김민수. 봉화산 인근의 과부와 총각이야기
 
향토사학자 김민수   기사입력  2009/12/26 [13:38]
일명 아차산 박사로 불리는 광진구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아차산봉수대가 있었던 중랑구 묵동 봉화산 인근에 전해 내려오는 옛 이야기를 모아 재구성한 창작물‘중랑천의 박꽃과 수세미외꽃’을 「디지털광진」에 보내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민수 선생의 순수 창작물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 봉화산 봉수대. 옛날에는 아차산봉수대라고 불렀다.(사진-중랑문화원)     ©디지털광진 ◀


 

           중랑천의 박꽃과 수세미외꽃

 

                                                 향토사학자 김민수

   봉화산은 드넓은 평야에 우뚝 선 아름다운 산입니다. 사방이 탁 트여서 옛날에는 아차산봉수대라고 불렀습니다. 봉수대의 일은 길(吉)씨들이 맡아서 해왔습니다. 봉화산 기슭의 경사지에는 배나무들을 많이 심었습니다. 옛날 영월로 귀양가는 단종 임금님이 이곳을 지나면서도 죄인이라고 하여 물 한모금도 먹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내 단종 임금님은 강원도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일을 담당하였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이가 슬픔에 겨워 이곳에 물기가 많은 배 과일 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다고 합니다. 배나무가 자라서 과일이 열릴 때마다 한 바구니를 가뜩 담아서 돌아가신 단종 임금님께 올렸습니다. 갈증이 났어도 목을 축이지 못한 단종 임금님의 한을 풀어드리려고 그랬답니다. 봉화산 기슭이 중랑천에 이르면 넓은 평야가 펼쳐집니다. 불암산에서 흘러오는 묵동천까지 합쳐져서 충적평야를 이룬 곳입니다. 옛날 연산군의 폭정을 예견한 내시 최별감이 이곳에 와서 살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내시들이 줄줄이 모여들어 내시촌을 이루었습니다. 내시촌은 후손들이 끊겼다고 해서 막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봉화산의 소나무로 참숯을 구어서, 그걸로 먹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막골과 비슷한 먹골로 동네 이름을 바꿨습니다. 먹골배의 명칭도 여기서 생긴 것입니다. 먹골을 한자로 바꾼 것이 묵(墨)동입니다. 묵동에는 역사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옛날 봉화산 기슭에 억척스런 과부 길녀와 부지런한 총각 돌쇠가 살았는데.

   봉화산 기슭의 배나무 밭 사이사이에는 띄엄띄엄 밭들이 있습니다. 나무를 베고 돌들을 캐내서 개간한 밭들입니다. 자투리땅들이 이어져 드문드문 널려 있는 바위 섬(더미)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잘 가꾼 정원처럼 아기자기한 밭들입니다. 이러한 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청상과부가 있었습니다.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서도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살았습니다.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혼자가 되었습니다. 혼자서 살만큼 억척이었습니다. 엉덩이가 얼마나 컸는지 호박댁이라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저 성을 따서 길녀(吉女)라고 불렀습니다. 조금 떨어진 이웃한 오막살이에는 최(崔)씨 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 말이 총각이지 혼기를 훌쩍 넘겼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멀리 머슴살이를 갔었다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차곡차곡 모은 새경(품삯)으로 밭을 샀습니다. 아래 동네의 논도 빌려서 소작도 하였습니다. 몸이 돌처럼 단단해서 돌쇠라고 불렀습니다. 최돌쇠입니다. 그러나 서로는 모르는 척 내외를 했답니다. 돌쇠는 곧 죽어도 자기는 총각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길녀도 혼자 수절하며 꼿꼿하게 살아온 청상과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서로는 밭농사를 지으면서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남자인 돌쇠가 훨씬 농사를 잘 지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논과 밭농사를 함께 짓는 돌쇠보다도 밭농사만 하는 길녀가 훨씬 잘 살았습니다. 돼지를 치고, 닭을 길러서 달걀도 받아냈습니다. ‘과부는 은이 서말, 홀아비는 이가 서말’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것일까요. 그렇다고 돌쇠가 부지런하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머슴살이 때부터 일에 배인 돌쇠가 아니겠습니까. 돌쇠가 더욱 속상한 것은 고추 농사를 지을 때입니다.
 

길녀가 지은 고추농사의 비밀은?

   고추 모종들을 밭으로 옮겨 심고 난 다음부터는 자라는 게 달랐습니다. 돌쇠의 고추밭은 서리 맞은 것처럼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녀의 고추밭은 생기가 넘쳤습니다. 고추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면서는 더더욱 차이가 났습니다. 길녀의 풋고추들은 힘에 겨워 고개를 번쩍 쳐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쇠의 풋고추는 맥없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어도 돌쇠의 고추 열매는 수확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말라비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길녀는 신이 났습니다. 말린 고추를 머리에 이고 사나흘이 멀다하고 두모포를 다녀왔습니다. 두모포는 중랑천, 청계천, 한강이 만나는 제일 큰 포구였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한껏 사오는 물건을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생선 꾸러미까지 들고 있었습니다. 산들바람을 따라 풍겨 오는 생선 굽는 냄새는 더더욱 돌쇠를 괴롭혔습니다.  

   다음해에도 똑같이 고추 농사를 지었습니다. 돌쇠는 거름도 주고, 김도 매면서 고추 밭에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작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웃 길녀의 풋고추는 싱그럽다 못해 윤기가 흘렀습니다. 돌쇠는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잠도 잘 오지 않았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길녀의 고추 밭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산짐승이 내려와서 길녀의 고추 밭을 망가뜨리나 싶어 고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밭까지 올까봐서 언뜻 정신을 차렸습니다. 조심조심 길녀의 고추 밭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산짐승이 아니었습니다. 길녀였습니다. 검은 치마를 양 손에 치켜 올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속옷인 하얀 고쟁이가 보일 때마다 풋고추들은 덩달아 벌떡벌떡 일어섰습니다. 쑥쑥 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고추밭을 다 돌고서야 길녀의 엉덩이춤은 끝났습니다. 그제야 풋고추들의 아우성도 멈췄습니다. 뒷날 길녀의 풋고추들은 무성한 고춧잎들을 제치고 한껏 자태를 뽐냈습니다. 돌쇠는 아리송했습니다. 캄캄한 밤에 몰래 고추밭으로 나왔습니다. 바지의 허리끈을 풀었습니다. 허리춤을 넓혀서 두 손으로 움켜잡았습니다. 그리고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고추밭을 돌았습니다. 비지땀이 흘러내려 멱(목욕)을 감는 것 같았습니다. 뒷날 돌쇠의 고추밭은 엉망이었습니다. 고춧잎들은 풀이 죽어 있었고, 풋고추들은 아예 그 사이에 숨어버렸습니다. 돌쇠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몰래 길녀의 엉덩이춤을 훔쳐보았습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풋고추들이 길녀의 엉덩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고 다음해의 농사를 궁리했습니다. 해답이 나왔습니다. 호박 농사를 짓기로 작정했습니다. 길녀의 엉덩이만한 호박 농사입니다. 
 

돌쇠의 배꼽춤으로 호박밭에도 생기가 넘치고, 길녀는 가지를 키우는데

   돌쇠의 호박밭은 생기가 넘쳤습니다. 호박잎에서 물방울이 구르는 것이 마치 구슬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애호박이 열리면서 돌쇠의 배꼽춤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애호박들도 들썩거렸습니다. 그리고서 함박 그릇처럼 앉은 자리를 넓혔습니다. 그럴수록 신이 난 돌쇠는 캄캄한 밤만 되면 배꼽춤을 추었습니다. 배꼽춤을 따라 애호박들도 요강단지처럼 벌렁거렸습니다. 쩍쩍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다 자란 청둥호박은 길녀의 엉덩이보다 탐스러웠습니다. 돌쇠도 휘파람을 불며 두모포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지게 소쿠리에 잔뜩 산 물건을 지고 왔습니다. 물론 생선 꾸러미도 들고 왔습니다.  

   길녀도 돌쇠의 호박 농사를 짓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부러웠습니다. 호박은 뚝뚝 따가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추는 여간 손이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익은 고추를 따고 난 다음에도 잘 말려야 내다 팔 수 있었습니다. 길녀는 샘이 나는 만큼 고민도 깊어갔습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열매가 어떤 것이 또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아냈습니다. 고추보다 큰 가지였습니다.  

   길녀의 가지 모종은 옮겨 심으면서부터 쑥쑥 자랐습니다. 자줏빛 열매가 열리면서 길녀의 요란한 엉덩이춤도 시작되었습니다. 돌쇠에게 질세라 마구 흔들어 댔습니다. 흔들어 대는 길녀의 엉덩이를 따라 가지 열매들도 덩실거렸습니다. 점점 더 우람하게 자라는 자줏빛 가지 열매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제 힘에 겨워 꺼덕거렸습니다. 길녀의 가지밭은 자줏빛 방망이들의 향연장이 되었습니다. 잘 익은 가지 열매를 따는 재미는 이루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미끈한 가지 열매는 잡는 촉감부터 좋았습니다. 가지를 짜를 때마다 길녀의 이마에는 수확의 기쁨으로 영근 구슬땀들이 맺었습니다. 가지는 자주 수확할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호박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럴수록 길녀의 나들이도 많아졌습니다. 어떤 때에는 옷감도 끊고 왔습니다. 따도 따도 수없이 달리는 가지 열매를 거느린 길녀는 가지밭의 여왕이었습니다.
 

돌쇠의 배꼽춤과 수박, 길녀의 엉덩이춤과 참외는?

   이제는 돌쇠가 고민한 차례였습니다. 치맛자락을 허리춤에 찌르고 나들이 하는 길녀를 볼 때마다 속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부러웠습니다. 호박 줄기는 여러 갈래로 멀리 뻗어서 땅을 많이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호박은 듬성듬성 열렸습니다. 수지가 덜 나는 농사였습니다. 그렇다, 돌쇠는 손바닥을 쳤습니다. 그걸 몰랐다니, 수박이었습니다. 한 여름 수박만큼 잘 팔리는 게 있을까. 가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짜른 수박 조각들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장터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속이 벌건 수박이야말로 노총각인 자기를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할수록 돌쇠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바로 수박 구덩이들을 만들었습니다. 흥에 겨워 어깨춤이 절로 났습니다.  

   길녀는 돌쇠가 수박 농사를 짓는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돌쇠의 생각이 기특했습니다. 그렇다. 여름 한철 농사다. 망설일 새가 없었습니다. 길녀에게 딱 맞는 여름 열매는 참외였습니다. 옛날 토종 참외는 길둥글고 줄무늬가 뚜렷했습니다. 그런 참외들이 길녀의 엉덩이춤에 사족을 못 쓸것은 뻔한 일입니다. 길녀는 돌쇠에게 뒤질세라. 부지런히 참외 구덩이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욕심을 내서 자기 엉덩이만큼 큰 구덩이들을 만들었습니다.  

   하얀 배꽃들이 봉화산 기슭을 수놓았습니다. 그 사이에 짙푸른 군락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돌쇠의 수박밭과 길녀의 참외밭이었습니다. 하얀 배꽃들이 떨어지고 나서는 더더욱 돋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박과 참외들이 열매를 맺을 즈음에 길녀의 엉덩이춤과 돌쇠의 배꼽춤도 시작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캄캄한 그믐밤에만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도 서로가 눈치를 보면서 한 사람이 추고 나서 한참 후에 추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내외한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믐밤만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달 밝은 보름밤에도 추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추었습니다. 서로가 훤히 보여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는 아래 동네 사람들도 남녀가 추는 괴이한 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달밤에 춤 춘다’는 얘기가 딱 들어맞았습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습니다. 중랑천 변의 사람들은 죄다 알게 되었습니다. 흉측하다는 사람, 깔깔대는 아녀자, 껄껄거리는 남정네, 모두가 보름달이 뜨는 밤을 기다렸습니다.
 

수박과 참외가 너무 여물어 벌어져 버리고

   밭고랑 길은 참외 잎사귀들이 어우러져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박 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는 성큼성큼 뛰어 넘으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럴수록 참외와 수박들은 쑥쑥 자랐습니다. 거짓말을 보태서 돌쇠의 허벅지만한 참외와 길녀의 엉덩이만한 수박들이 우람한 자태를 뽐냈습니다. 길녀와 돌쇠는 신이 났습니다. 잘 익은 참외와 수박들을 두모포에 내다 팔 날을 생각하면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그래서 밤을 더 기다렸습니다. 밤이 되면 신들린 사람처럼 마음껏 춤을 췄습니다. 날씨까지 좋았습니다. 눈부신 햇살을 쬔 참외와 수박들은 속이 꽉 차서 부풀을 대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수확할 일만 남았습니다. 길녀와 돌쇠는 서로 먼저 내다 팔기 위해서 엉덩이춤과 배꼽춤을 요란하게 추어댔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추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물 대로 연문 열매들은 더 자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녀의 춤사위는 더 요란해졌습니다. 그럴수록 사랑에 겨운 열매들을 속살을 부풀렸습니다. 견디지 못한 열매의 껍질들이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갈라지면서 터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참외는 줄무늬를 따라 세로로 금이 갔습니다. 수박은 박을 자르듯이 가운데로 금이 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길녀가 참외를 만지면 ‘짜악’하고 벌어졌습니다 참외의 노란 속살이 길녀를 반겼습니다. 돌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돌쇠가 수박을 만지면 ‘뽀옥’하고 벌어졌습니다. 시뻘건 수박의 속살이 돌쇠를 반겼습니다. 미칠 일입니다. 춤을 고사한고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도 참외는 ‘짜악, 짜악’ 수박은 ‘뽀옥, 뽀옥’하고 장단을 맞추며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터진 참외와 수박은 아래 동네 사람들이 몫이 되고...

   누구보다 일찍 맏물(첫 수확)을 내다 팔면,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그러나 손도 댈 수 없고 걸어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길녀는 금이 간 참외들을 광주리에 담았습니다. 몇푼이라도 받고 팔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참외의 단물은 길녀의 얼굴을 흠뻑 적셨습니다. 두모포는 고사하고 아래 마을 동구 밖에서 광주리를 내려놓았습니다. 몰려드는 아이들에게 이고 온 참외들을 나누어 주고 말았습니다. 돌쇠도 소쿠리에 금이 간 수박들을 담았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게에서 ‘뽀옥, 뽀옥’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시뻘건 수박의 단물이 엉덩이를 타고 내려와서 바지가랭이를 감쳤습니다. 더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논두렁 어귀에서 참을 먹는 사람들에게 수박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쏟아지는 참외는 우리 간의 돼지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수박을 따 가라고 아래 동네에 소리 방문을 돌렸지만, 누구 하나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춤추며 키운 수박을 따 가는 것이 미안해서 그랬나 봅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길녀는 광주리에, 돌쇠는 소쿠리에 참외와 수박을 이고 지고 아래 동네에 날랐습니다. 이왕에 버릴 것, 인심이나 쓰고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경쟁이 붙었습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아래 동네를 들락거렸습니다. 길녀와 돌쇠가 서로 마주치면 ‘흥’하고 콧기침을 하면서 토라진 내색을 했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푸념을 오죽했겠습니까. 서로의 흉까지 들먹였습니다. 한여름 아래 동네 사람들은 매일 매일 참외와 수박잔치를 벌였습니다. 길녀와 돌쇠의 푸념까지 곁들어진 멋진 공연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길녀의 엉덩이춤을, 남자 아이들은 돌쇠의 배꼽춤을 흉내내면 온 동네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길씨와 최씨 집안에서는 둘을 맺어주는데

   웃을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묵동은 길(吉)씨와 최(崔)씨들의 집성촌이었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길녀와 최돌쇠의 편이 나누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 동네까지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끝물인 참외와 수박이 내려오고 나서입니다. 동네 어른들이 모였습니다. 이렇게 참외와 수박을 얻어 먹으면서 그들의 푸념에 맞장구나 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네까지 두 편으로 나누어지면 더더욱 안 될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길녀와 돌쇠를 한 살림 꾸리게 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부부의 연을 맺어 주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집안의 웃어른들이 하는 것이므로 길녀와 돌쇠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돌쇠는 길녀의 억척이 부러웠습니다. 엉덩이를 흔들 때는 아랫도리까지 뻣뻣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허나 과부와 총각이라는 벽 때문에 그런 생각은 묻고 살았습니다. 그 벽을 동네 어른들이 허물어 준 것입니다. 길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돌쇠와 지나칠 때에 물씬 풍기는 땀 냄새는 길녀를 아찔하게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려고 허벅지를 꼬집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돌쇠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는 혈혈단신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마지 못하는 척 어른들의 결정을 따랐습니다. 홀아비가 처녀와 결혼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과부가 총각하고 내놓고 결혼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둘은 수세미외와 박을 심어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살림은 잘 정돈된 길녀의 집에서 시작했습니다. 돌쇠의 집은 헛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념으로 수세미외와 박을 심었습니다. 길녀가 심은 수세미외는 새끼줄을 따라 처마 위로 올라갔습니다. 노란꽃이 피더니 금세 길다란 수세미외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돌쇠가 심은 박은 초가지붕을 덮었습니다. 달 밝은 밤에는 하얀 박꽃이 달맞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박들이 열렸습니다. 초가집에서는 밤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배꼽춤과 엉덩이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수세미외와 박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잘 벌어진 수세미외는 말 그대로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가 됩니다. 박은 쪼개져야 바가지가 됩니다. 해마다 돌쇠의 허벅지만한 수세미외가 처마에 매달렸습니다. 지붕에는 길녀의 엉덩이만한 박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뿐이랴, 초가집에서는 사랑의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해거리 없이 아이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아들 셋, 딸 셋을 낳았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은 길녀가 지었습니다. 고돌이·가돌이·참돌이입니다. 고추·가지·참외의 이름을 땄습니다. 딸들의 이름은 돌쇠가 지었습니다. 호순이·수순이·박순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호박·수박·박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살림도 부쩍 늘었습니다. 행복이 넘치는 초가집이었습니다. 달 밝은 밤에는 초가집까지 웃음소리에 흔들거렸습니다. 가족 모두가 배꼽춤과 엉덩이춤을 추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중랑천 변에 사는 사람들은 수세미외와 박을 심었습니다. 수세미외가 매달리고 박이 얹어져 있는 초가집들은 중랑천의 물결을 따라 흔들거렸습니다. 그렇게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화학섬유로 만든 수세미가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초가 처마에 새끼줄을 쳐서 수세미외를 길렀습니다. 잘 말린 수세미외를 조금씩 잘라서 설거지할 때 수세미로 썼습니다. 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플라스틱 바가지가 없었습니다. 사기그릇은 잘 깨져서 바가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바가지는 무거워서 사용하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박을 심었습니다. 큰 박이 열리면 큰살림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큰바가지는 곡식도 간장도 가득 뜰 수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흥부와 놀부의 설화에서 박타는 타령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대박이 터졌다’는 은어도 그렇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꼭 필요한 수세미외와 박을 초가집에 심어서 정겨운 운치까지 곁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이야기까지 꾸며서 훈훈한 삶의 정취를 이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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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2/26 [13:38]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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