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문화가 진보를 유혹하고 있다
이주헌 지음 <지식의 미술관>
 
심범섭 시민기자
 
배움의 높이도 어지간히 쌓고 거기다 이런저런 교양서적도 휘돌아 쳐 읽었건만, 웬일인지 먹으로 쓴 글씨나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자물쇠로 잠근 듯 입이 딱 얼어붙고 만다. 그럴 때 옆에 가족이나 친구라도 서 있으면 뭔가 감춰놓았던 비밀이라도 들킨 듯 전신에 진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게 마련이다. 무식은 죄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부끄러운 것도 아니련만.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
이럴 때 주변에 ‘아트 어드바이저’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야! 이건 대체 뭔 그림이냐?’ 라고 슬쩍 운만 떼도 “이건 엘긴의 변명이야” 뭐 엘긴의 변명… “이를테면 말이지… 사기 친다는 뜻이라고 나 할까…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그림을 지들 제국의 문화재라고 빡빡 우기는 그런 치사한 변명 흥! 그러니까 힘의 논리 같은 거지, 더럽고 구차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치사스러운 짓거리를 두고 하는 말이야” 음~ 과연! 그러나 그건 현실이다. 이런 못된 관습이 기를 팍 꺾어 놓으려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누구엔들 없으랴. 그러나 이제 그런 염렬랑 풀어놓아도 좋을 것 같다. 미술감상을 위한 키워드 서른 개가 당신의 품위를 위해 잘 준비되어 있으니 말이다.
 
비록 내가 저 아트 어드바이저처럼 어떤 그림에 대해 물 흐르듯 신바람 나게 설명해 나갈 수야 없겠지만… 그러나 이 서른 개쯤의 키워드만 알고 있어도 “어 그건 말이야, 나도 어떤 책에서 본 이야기이긴 한데, 일테면 말이지” 제법 점잔을 빼가면서 “고대 이집트 미술에선 말이야, 파라오 같은 지배계급과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민중을 표현할 때 ‘개념상’과 ‘시각상’이라는 아주 다른 표현기법으로 그려진다는 거야, 우리가 이집트 고대미술을 볼 때마다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곤 하던 바로 그 이상한 그림 말이야, 이를테면 측면에서 보는 얼굴에 정면에서 보는 눈이나 가슴 또는 손과 발이 표현되어 있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개념상’이라는 거야, 지배 계급의 몸의 각 부위는 목적에 따라 해체되어서 인식되고 그것이 개념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그림의 한켠에 있는 농민, 노예, 무희, 여성의 경우는 모든 몸의 부위가 아주 정상적인 측면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들은 피지배 계급으로서 진리, 이상, 신, 영원 같은 위대한 가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순간에 살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목구비와 몸! 또한 순간의 기능일 뿐이기 때문에 순간의 인식 수단인 시각에 포착되는 이미지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서 ‘시각상’이라는 표현기법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지… 허허 내가 뭐 좀 아는 체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이 서른 개의 키워드를 내 놓으며 하는 말 ‘단순히 지식의 양이 감상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경험이 ‘구슬’이라면 그것을 ‘꿰는 실은 직관’이다.’ 히 야!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 주목하라. ‘지식과 경험은 작품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배양시켜주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지식과 경험의 확대는 미술감상의 필수’다.’ 음! 그러면 그렇겠지… 결국 머리통에서 곰삭는 군덩내를 따라 예술이 다가온다는 말이로구나, 역시 예술은 고급한 것이어서 우리가 기웃거릴 동네는 아닌지… 아프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사실 이는 인간이 인간화의 길에서 인간의 수준을 높여 갈수록 인간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이 아닐까 한다. 결국 공부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특히 문화의 시대에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하여간 필자는, 외람된 줄 알지만 이 ‘지식의 미술관’을 소개하면서 진보진영이 오늘을 읽어내기 위해 어떤 성찰이 필요한가 하는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풀어 말해서 진보 진영이 처한 오늘의 위기가 우리의 무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역사로서의 오늘을 읽어내고 거기서 대안을 제시하는 우리의 인식능력을 키워가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부터 확실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갈 길인 진보라는 개념이 우리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보수가 걸어온 역사의 길에서 읽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역사라는 강줄기의 이쪽과 저쪽에 있는 상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흔히 진보와 보수를 좌우로 표현 하지만, 진보와 보수는 땅과 하늘 하와 상의 관계다. 물질과 관념, 유와 무의 관계다. 존재의 근원을 찾고 거기서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철학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좌우로 인식되는 진보와 보수의 관계는 갈등구조의 틀로서 보수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했던 보수의 들러리였다. 보수의 내부 상황에서 존재하는 진보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전개한 진보개념은 잘못 된 것이었다. 좌우로 인식되는 그 첫발의 인식착오가 진보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고 지휘하는 한 우리는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고 대상과의 투쟁에서 실패를 거듭할 없었던 것은 애초 보수의 설계도가 기획한 것이기 때문에 진보의 모든 성과는 결국 보수의 먹거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저자 이주헌도 말했듯 인간의 역사는 늘 고뇌하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 위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을 건설해 나간다. 그건 아마 아니 틀림없이 문화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추구해온 것은 대상부정의 가치다. 그 첫 자리에 대상을 완벽하게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무력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은 그 마지막 자리에 대상을 완전하게 긍정하려는 ‘사랑’을 구축하고자 했다. 전자가 이성에 의한 부성 가치며 후자가 감성에 의한 모성가치다. 그 중간에 정치, 경제, 문화라는 가치를 배열하고 있다. 이는 대상부정이 대상긍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말한다. 경제적 가치가 비록 약육강식이라는 무한경쟁을 허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때의 무한경쟁은 긍정과 부정의 중간지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해방과 자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늘 외로웠다. 창조자들은 늘 슬펐다. 그래서 마약과 술과 성과 광기와 방황과 그리고 마지막엔 자살과 싸웠다. 그들의 고뇌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문화의 시대에 그 해방과 자유가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자고 유혹하고 있다. *
 
▶     © 디지털광진 ◀



 
기사입력: 2009/12/04 [19:47]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