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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일대의 문화유적의 보존과 활용
[김민수 향토사학자] 대전문화연대 '산성워크숍' 발표 글
 
김민수 시민기자
 
(이 글은 지난 27일 2009년도 문화재청이 공모한 지자체 문화재 활용 우수사업에 선정된 대전문화연대의 「산성의 보존과 활용사례발표 위크숍」에서 발표되었던 내용입니다).
 
▶ 27일 대전문화연대 주관으로 열린 '산성워쿄숍' 맨 오른쪽이 김민수 향토사학자 (사진제공-대전문화연대)    © 디지털광진 ◀
 
[아차산 일대의 문화유적의 보존과 활용에 대하여]
 
1.  고대사에서의 아차산의 역사적 개괄
     한강하류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었다.   한강의 지류인 중랑천은 아차산 기슭에서 약 3만 년 전의 구석기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만들어 냈다.  그들이 사용하였던 찍개. 뾰족개. 긁개등의 유물 300여점이 이곳에서 채집되었다.  아차산에서 한강을 건너 남쪽의 암사선사주거지 유적은 6,000여 년 전의 신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유적이다.  아차산의 북쪽 망우산에서부터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까지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들이 널리 퍼져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 광진구 구의동 태봉유적이다.  이와 같이 한강 하류의 위쪽 아차산 주변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이었다.
 
     마한. 진한. 변한의 시대를 삼한(三韓)시대라고 한다.  맹주로 불리우는 마한의 지역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로 보고 있다.  그 후 마한 내의 작은 나라였던 백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마한은 전라도 지방으로 밀려갔다.   백제는 한강하류 남변의 풍납토성을 왕성인 위례성으로 하여 크게 번영하였다.  이러한 위례성을 지키기 위하여 한강 북안의 아차산에 쌓은 성이 아차산성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을 내쫓았다.  강해진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에 아리수(지금, 한강)를 건너 백제를 굴복시켰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이러한 백제를 아예 토벌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을 잡아와서 아차산성 밑에서 참살하였다.  백제는 어쩔 수 없이 도읍을 웅진(지금, 공주)으로 옮기게 된다.  한강을 차지한 고구려는 아차산 일대에 수많은 보루(작은 성)들을 쌓았다.  사적 제455호(2004)인 아차산 보루군이다.  이러한 보루군 중에서 고구려의 기와가 채집되는 곳은 홍련봉 제1보루이다.  이곳이 고구려의 본부였다.

     신라는 중국과 싸우면서 쇠약해진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빼앗았다.  한강을 차지한 것이다.  신라는 한강을 버팀목으로 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차례 정벌하였다.  그리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였다.
 
2.  아차산 일대의 유적의 개요
     아차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서울로 밀어닥치는 물줄기를 가로누워서 서쪽으로 돌려놓았다.   이리하여 한강하류의 위쪽인 아차산 일대는 충적평야가 펼쳐져서 고대국가의 발원지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선사시대의 유적지말고도 역사시대의 큼직한 유적지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다.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이러한 왕성을 지키기 위하여 한강 북안(北岸)에 쌓은 아차산성이 관방체제로써 뚜렷하다.  또한 석촌동고분과 방이동고분이 남아있다.   근래의 조사에서 아차산 일대에도 수많은 고분들이 확인되었다.  또한 절이 있었던 폐사지들이 나타나고 있다.  무속신앙 터까지 여러 군데 있었다.  옛날의 전설까지 채집되면서 아차산은 고대사의 보고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강을 지키는 파수꾼인 사적 234호인 아차산성과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할 수 있는 사적 455호인 아차산 보루군이다.  아차산성은 지금까지 조사과정에서 삼국시대의 유물은 신라것들만이 채집되었다.  또한 기와에 北 . 漢. 山. 이라는 수많은 암각문들이 새겨져있어서  백제의 아차성이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새롭게 재기되고 있는 견해는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완연한 석벽이 드러난 석성이 확인되면서 처음 쌓을 당시에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되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바로 석성으로 쌓았는지도  규명하여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다.
 
     아차산 보루군은 대부분 고구려에 의하여 쌓았다.  아차산 능선을 따라 우뚝 선 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쌓았다.   사적 455호로 지정된 보루만도 16개소에 이른다.  지정되지 못한 것이나 소실된 것을 합치면 무려 30여 개소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가 한강을 장악하였던 증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의 보루들이 유독 한강하류의 위쪽 북안(北岸) 아차산 일대에만 집중적으로 구축되었는가 하는 의문과 아차산 일대에 한정된 고구려의 보루들이 거슬러 올라가 남한강·북한강 유역까지도 통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또한 보루에서 채집되는 유물 특히 토기들의 편년은 고구려의 한강 유역 점유기간에 대한 각기 다른 견해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삼국관계 기년과도 맞물려져서 삼국사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아차산 일대의 고분들은 대략 3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 파괴되었다.  도굴에 의하여 손괴된 것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묘실이 형태가 남아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돌덧널무덤이거나 돌방무덤들이다.  바위 봉우리에 있는 돌방무덤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어서 사람들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완연한 형태의 고분과 묘실이 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은 도굴의 염려로 공개하고 있지 않다.
 
     아차산에는 많은 절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절은 화양사(지금, 영화사)와 범굴사(지금, 대성암) 둘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은석사(銀石寺)가 있었다.  아차산 삼층석탑 주위도 이름을 알 수 없는 폐사지이다.  근래에 확인된 화관암(花冠庵)터가 있다.  온달샘 주위도 탑부재와 주춧돌들이 널려 있어서 폐사지이다.  탑부재들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화강암 석재들을 잘 다듬어 기단을 만든 넓은 건물지가 있다.  기와와 주춧돌들이 발견되고 있다.  역사적 관소(官所)인지 사지(寺址)인지는 발굴조사에 의하여 확인될 것이다.
 
     이외에도 살곶이 목장의  담벽인지, 보루와 보루 사이를 연결하는 성벽인지, 알 수 없는 유구가 아차산 능선상에 길게 뻗어 있다.  성격의 문제를 뒤로 미루더라도 중요한 유구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대단한 역사(役事)를 감당한 주체는 국가이므로 그렇다.  고대의 관방시설의 유구로 밝혀질 경우에 삼국관계의 사회상을 다시 고쳐 써야 할 만큼 그 파장은 대단할 것이다.
 
3.  아차산 일대의 문화유적의 보존과 활용에 대하여
     아차산 일대의 문화유적은 고대국가의 발원지인 한강하류 유역에 있었음에도 조사된 예가 거의 없었다.  앞서 언급하였던 청동기시대의 태봉유적지만이 조사되었다.  한강하류 南변의 큼직큼직한 유적지에만 치중한 나머지 소외되었다.  다만 아차산의 상징성을 가진 사적 234호인 아차산성으로써 역사적 소임을 마무리시켰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구려의 관방체계인 사적 455호 아차산 보루군의 발견으로써 새삼 각광받게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시켜 주는 증표다.  그리하여 고구려史를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당당한 자료로써 온 국민의 시선을 받는 지역이 되었다.
 
     문화유적의 보존은 시급한 일이지만 서두를 수 없는 일이다.  철저한 조사와 이에 걸맞는 보존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활용의 극대화를 위한 학술·교육·홍보 등의 선양사업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사적은 국가의 정체성을 드높히고 학술적 가치를 배가하는 차원에서 조사와 보전이 이루워져야 한다.  따라서 국가의 시스템에 의하여 관리되어 왔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직접 감당할 수 없는 사적지에 대하여 관할 지방자치단체에게 조사를 의뢰하거나 종용하여 왔다.  반대로 관할 지방자치단체의 요청에 따라 조사를 허가하여 왔다.  한때 지역의 문화재는 관할 행정관청의 미운 천덕꾸러기였다.  예산 지원은 거의 없었다.  손괴되거나 유실되었을 때에는 문책만이 돌아왔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시작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문화사업이 지역민들을 흥이 나게 하고 그  흥은 파급되어 문화상품으로써 지역경제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역사의 인물들이 출생지. 유배지. 무덤까지도 자기 지역에 있었다고 서로 우기는 사례가 여러 곳에 있다.  전설상의 인물까지도 그러하다.  하물며 고구려는 대외적인 국호인 KOREA이다.  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시사성 높은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은 행정구역상에서 양분되어 있다.  이에 따라 두 지방자치단체(광진구.구리시)의 고구려복원 사업은 경쟁적으로 과열되어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이는 시사성이 높은 고구려의 관계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하려는 언론매체들이 반사적으로 두 지방자치단체를 흠집내는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결국 문화재는 그 소재지의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고 활용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 지방자치단체가 고구려 역사·문화의 선양에 발벗고 나서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서로 중복되는 사업을 조정하여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활용 방안을 살려나간다면, 국가나 국민들로서는 열과 성을 다하여 복원된 고구려 문화와 역사를 향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두 지방자치단체의 고구려 역사·문화 복원사업에 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조정자의 기능을 다하여야 한다.   학술적인 지도와 보전과학의 도움까지 주워야 한다.  더 나아가 지방자치단체가 감당하기 버거운 고구려 역사·문화 복원사업의 재원조달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복원사업을 수립한 두 지방자치단체의 계획은 큰 선에서는 대체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처음 사업을 구상한 구리시는 넓은 공간을 활용하여 고구려 테마공원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직접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사업은 수익성을 얻을 수 있어 지방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시험적으로 태왕사신기의 세트장인 대장간마을을 2종 박물관으로 개량하여 성공적으로 활용하는 예가 그렇다.  광진구는 서울에 소재한 고대문화 유적들과 아차산의 아차산성. 고구려 보루군을 연계시켜 고대문화벨트의 구축을 착안하고 있다.  한강 남쪽의 암사동선사유적지·풍납동토성·몽촌토성까지 묶는 고대문화벨트이다.   이러한 착안은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사업과 맞물려 효용성을 높이고 있다. 고대문화벨트의 약점이었던 한강경계를 과감히 타파한 것이 걸어다닐 수 있는 광진교의 개량이다.  이로써 고대문화유적지들을 도보나 자전거로 돌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적지들은 지하철의 역세권에 각기 있어서 시민들이 찾아오기 쉽다.  따라서 몽촌토성 소재지인 올림픽공원에 백제박물관이 세워지는 것에 맞춰 아차산 기슭에 고구려역사문화관을 건립하자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천년 사직을 이어온 신라의 보고라면,  백제박물관에 이어 고구려역사문화관이 세워짐으로써 서울은 삼국시대를  망라한 상설 전시관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설전시관이나 테마공원은 실지로 볼 수 있는 사적 아차산성과 사적 아차산 보루군과 연계시킴으로써 교육·홍보의 효과를 더 높힐 수 있다.   따라서 두 지방자치단체(광진구·구리시) 간에 유적 탐방로를 연결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고 친환경적으로 유적 탐방로를 개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적지 또한 시민들이 관망하기 좋고 보행에 불편이 없도록 해야 한다. 기타 유적지(불교유적·고분·건물지)들과의 연계하는 방안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가야 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전문가집단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문화재청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 아차산의  문화유적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가치는 국가의 정체성을 선양하는 막중한 사업이기에 그러하다.
 
     문화유적은 역사의 퇴물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희망의 메시지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입로를 정비하여야 하고 주차시설을 확보하여야 한다.  또한 누구나 탐방로를 쉽게 찾아다닐 수 있는 안내서의 배포가 필요하다.  고구려 보루들의 경우 두 지방자치단체의 안내와 설명문이  조잡하게 엉켜있는데, 이를 문화재청에서 주관하여 하나로 간결하게 정리하여 주어야 한다.  또한 보전할 가치가 있는 보루는 그대로 두어 발굴·정비된 보루들과 비교시켜야 한다.  훗날 후손들이 연구할 대상으로 남겨 두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아차산은 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에 맞서는 국민들의 역사 교육의 장이 되었다.  누구나 자기의 역사관을 이야기하면서 아차산의 보루길 능선을 오르내린다. 시원스럽게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역사 속으로 젖어드는 것이다.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려는 탐방객들도 늘고 있다.  그래서 해설가들을 양성하는 방안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해설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정년을 마친 노인들이거나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산길을 오르내리는 자체가 버거웠다.  또한 고대사의 지식은 단기간 내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학설이 있는 것도 학습의  장애 요인이었다.  그래서 문화탐방에 관심이 있는 단체 또는 개인들에게 수시로 탐방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인터넷 시대의 젊은이들로서 자기의  소견까지도 개진하여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였다.  지금 아차산에는 휴일 날 수많은 문화탐방 단체들이 나름대로의 안내 책자를 만들어서 유적지들을 돌아보고 있다.  둘러앉아서 토론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러한 풍토는 바람직한 것이다.  듣고 따르는 구태의연한 탐방에서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산교육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들에게 전문가 집단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선된 자료가 제공된다면 교육의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 지방자치단체의 고구려 역사·문화 복원사업은 타당한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가 있었던 곳에서 고구려를 상기하고 고구려를 선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탕은 문화유적이 소재한 아차산 기슭의 주민들의 참여와 국민들의 성원으로 펼쳐져야 한다.  그 바탕에서 고구려의 문화가 꽃피고 힘찬  기상이 뻗칠 것이다.
 

▶ '산성워크숍' 기념촬영 (사진제공-대전문화연대)    © 디지털광진 ◀



 
기사입력: 2009/06/29 [18:43]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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