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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자연에 들었다.
유소림 산문집 <퇴곡리 반딧불이>
 
디지털광진
 
  최근 웰빙이란 바람을 타고 전원 주택이다 유기농이다 귀농이다 하면서 다들 자연으로 돌아가느라 법석을 떤다. 그러나, 유행이란 게 다 그렇듯이, 바람이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기 마련이어서 자연임네 유기농임네 하던 말도 시나브로 사그러들게 뻔하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그 나마의 관심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귀에 꽤 익은 한 시인이 홀연히 자연에 들었다. 퇴곡리라는 곳이다. 시인이 간 곳은 시인이 갈만한 곳이었던지 여름밤이면 반딧불이 불을 켜고 날아다닌단다. 청정한 곳인 듯싶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을 끌어 댕기는 대목이 꼭 그것만은 아니다.
 
퇴곡리에 새집을 짓고 첫봄이 오자 뜻밖의 순례자가 찾아 왔다. 구절초며 뚝깔이며 민들레며 산국, 좁쌀풀, 달개비, 강아지풀이며 더러는 산괴불주머니 같은 제법 귀한 손님이며 흔하디 흔한 뱀딸기, 달맞이꽃도 찾아왔단다. 새 집을 짓고 미쳐 다 준비해 놓지 못한 화단이지만 찾아 온 순례자들의 잔치는 요란하고 찬란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시인은 말하길 '내가 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꽃이 나를 선택했고 꽃이 나를 찾아왔다'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시인은 말한다. '태어나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내가 태어난 세계의 푸른 동반자'들을 '진정으로 마주했다'고 했다.
 
그랬을 게다. '꽃이면 으레 돈을 치르고 사서'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 말뚝처럼 '꼭 박아놓고 제 좋은 식으로 키우는 것'이려니 만 여기고 있던 시인이니 아니 그랬겠는가. 그래서 이 순례자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 의해 하늘과 땅과 삼라만상이 온통 토막이 나서 번다한 인공물로 꼭 채워져 있는 것이 세상인 줄만 알았는데.....' 이 곳 퇴곡리에 오니 '꽃은 팔려오지 않고 스스로 찾아 왔다'며, 그래서 그 철을 따라 찾아 온 순례자들은 '천지산하의 하나하나를 이어주고 어우러지게 한다.'고,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 뿐이랴, 흰 눈이 펄펄 내리는 깊은 겨울날의 밤이다. 눈을 감으면 생각은 우주의 깊은 섭리를 따라 그 지평을 내 달린다. 그래서 밝아오는 마음의 눈은 발견한다. '봄날의 눈부신 꿈도, 여름의 끓어오르는 열망도, 가을의 흐드러진 열매'는 모두 그 '아리땁고도 가여운 것들을 자상하게 잠재워 깊은 휴식을 맛보게 하는 겨울이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겨울은 허공 중에 일월성신이 생겨나기 전 그 차갑고 어둡고 까마득한, 그러나 어머니의 태중처럼 아늑한 세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 겨울은 '세계를 향해 설핏 열려있는 바늘 끝 만한 문'이 아닐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겨울은 그 모든 것의 씨앗을 잉태한 모성이고 '태극'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냐고 시인은 겨울밤으로 열려있는 우주의 지평과 문답한다. 
 
 시인이 사는 퇴곡리 집 돌서덜(냇가나 강가 따위의 돌이 많은 곳-편집자 주)이 있는 언덕엔 몇 그루의 늙은 감나무가 서있다. '크고 싶은 대로 크고, 뻗고 싶은 대로 뻗어서' 조롱조롱 매달린 '자신의 열매를 사람들보다는 새들에게 더 주고 싶어하는 감나무' 그랬다. 그래서 이 감나무 언덕배기가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 온통 새들의 낙원이 되었다'는 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문명의 늪을 빠져 나와 홀연히 자연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랬다. 산촌의 겨울은 적막하지만 그러나 그 적막을 담고 있는 극점이랄까 그 자연의 영혼이 살고 있는 태극의 찬란하고 아름답고 그윽하고 신비한 힘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은 스르르 깨어나고 그래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산 것들이 죽어 있는 겨울'에서 오히려 '영혼의 눈이 깨어나' 우리 영혼의 '귀가 밝아지는' 혜안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흰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밤을 시인은 사랑했다. 시인은 탄식한다. '제 자식들에게조차 젖을 물리지 않아 점점 젖먹이 짐승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무슨 외계인처럼 시험관 속에서 번식하는' 인간계의 생명타락을 슬퍼했다. 이제 우리 인간은 '젖먹이 짐승조차 그리워해야 한다'며 절망했다.
 
▶ 퇴곡리 반딧불이     © 디지털광진 ◀
 '잡아먹히는 쪽보다 잡아먹는 쪽이 당연히 더 강하고 뛰어난 존재'라는 생각, '식물보다 동물이 우수하고 초식동물보다는 육식동물이, 또 육식동물보다는 인간이 더 우수하다는 생각' 그래서 '인간이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약육강식의 세계는 몇 평 안 되는 마당이지만, 시인이 살던 부천아파트의 풀잎마당에도 존재한다. 소위 생태학이라고 말하는 '먹이사슬'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약육강식의 사슬을 이루고 사는 인간의 세계'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경험한 우리의 역사요, 식민주의'가 아니던가. 왜 이런 생각을 학교의 교육과 연결시키지 못하느냐고 시인은 슬퍼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조용히 말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만, 천만에 인간은 자연계의 가장 오만한 기생동물'이라고 말이다.
 
 '혼자 커서 혼자 자라고 혼자 지는 씩씩한 들꽃들'이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움을 틔우고 한여름을 지나 풀벌레 소리에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문명에 사로잡혀 '아파트'라는 통속에 살면서 '네모난 기계 속에 들어가 올려지고 내려지는' 현실에 우리 인간을 위로해 주는 건 '내가 화초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개'라며 시인은 슬퍼했다.
 
 이 글은 자연을 노래하며 자연을 그리워한 한 편의 서사시가 아닐까 한다. 그의 언어는 우리의 언어와 사뭇 다르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욕망을 짊어지고 나가 싸우는 병사다. 그러나 시인의 언어는 인간의 욕망과 아니 시인의 욕망을 벗어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언어는 비록 완전히 자연으로 들어갔다고 야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언어가 인간이라는 세계에서 뿌리를 자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인간으로부터 자유롭다. 자연의 뭇 생명과 사물이 온전히 자신의 생명적 존재의 환희를 표현하는 언어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퇴곡리 반딧불이'는 시인이 의도하지는 않았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언어를 새로운 밭으로 이식하는 '말의 농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다만, 꼭 흠을 지적해야 한다면, 시인은 아직 지식인의 사치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유희를 다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언어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는 힘들 것이란 예감이 든다. 그는 단지 언어를 산촌으로 끌고 가서 방목하는 지식인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가 가야 할 길은 언어와 지식과 사상과 감성의 방목이 아니라 그것들을 다 훨훨 벗어버리고 다시 또 '인간의 삶'으로 들어서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 때 글을 모르는 '형님'이 말한 대로 풀꽃들은 '잡초'로 환생할 것이며 그가 예찬하는 꽃들은 아름다움을 내려놓고 풀들의 자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씨앗이 우리의 먹이임도 알게 될 터이다. 그것은 언어의 방목이 아니라 수확이 될 것이지만..  


 
기사입력: 2008/10/29 [09:06]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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