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엄마의 위대한 세계 ‘부엌 떼기’에 도전하자.
푼수 아낙이 수다로 차려놓는 조선의 밥상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이야기>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08/03/29 [15:05]
어떤 문화인류학자가 말하길 세계7대 불가사의에 더해 8대 불가사의를 꼽아야 한다면 그건 ‘문화의 개념’이라고 했지만… 팔방미인 이영미가 ‘대중문화’에서 ‘삶의 문화’로 탐구의 시선을 바꾸거나 이동한 걸 설명하는 것은 문화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의 문답풀이를 디딤돌로 놓고 살펴보기로 하자.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왜냐하면, 다들 똑똑하다고 칭송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팔방미인 이영미가 이제까지 자신이 활발하게 활동해오던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뛰쳐나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소나무 장작 타는 매캐한 연기와 그 불기에 익어 가는 토장국이며 묵은지며 메주, 그리고 막걸리 같은 조선의 삶들이 분비하는 군내들이 사방 벽에 찌들어 붙어서 코를 진동하는 부엌으로 제 발로 걸어서 들어갔기 때문이다. 지금 거기다 멍석을 깔고 앉아 긴 자리를 잡고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이걸 설명하자면 약간 촌스러움을 무릅쓰고 라도 어떤 녀석이 손 위아래인지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와 삶의 문화 중 어떤 녀석이 형인지 아우인지 또는 항렬이 아랜지 위인지 따져 봐야겠다는 말이다.
 
음 그렇다면 이쯤 각설하고,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걸 압축해서 단 한 문장으로 말하는 게 있다. ‘천지인’ 그러니까 ‘하늘’과 ‘땅’과 ‘인간’ 그렇다. 그것이 세상을 통 털어서 온전히 말하는 모두다. 그런데 누가 짓궂게 그 셋 중 꼭 하나만을 짚어 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쩌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러 종교적인 판단갈등을 처리하느라 발설의 주저함이 있을지언정, 이내 우리는 그 마지막 남은 ‘왕 중 왕’의 자리에 ‘사람’을 올려 놓자는 데 별 어려움은 겪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서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게 정직한 대답이니까 말이다. 사람!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그건, ‘지금’ 이 순간에 바로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비록 이영미가 온갖 냄새들이 진동하는 부엌으로 들어간 것은, 문화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의 뿌리를 찾아 어머니와 그 어머니 어머니가 살던 할머니가 살던 부엌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영미가 누구인가. 그는 90년대 초반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란 책으로 결코 만만찮은 출발을 했고, 이듬해엔 ‘서태지와 꽃다지’란 글로 그 때까지 대중문화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면서 지독하게도 대중문화를 괴롭히고 왜곡하던 주범이자, 골칫거리였던 대중문화의 ‘딴따라’란 계급장을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또 후련하게 떼어내면서 우리의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대중문화에서 ‘딴따라’란 계급장을 떼어냄으로써 대중문화는 자연스럽게 민중문화와 어깨를 걸어 통합할 수 있었고, 문화의 주체적 공간을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이영미의 '서태지와 꽃다지'는 그 때까지 단순하기 짝이 없던 청년문화 담론을 일약 우리 사회의 중심담론으로 띄워 올리기도 했었다.
 
 물론 역사의 발전이 어느 개인이나 한 사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후 대중과 청년이 문화권력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이데올로기와 상품을 생산하는 정치와 시장의 생산주체가 그 기획과 생산라인에 대중과 청년이라는 소비자의 문화권력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대중이 현실사회와 역사를 견인하는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었으며, 민중과 대중이 그리고 청년들이 문화권력을 통해 역사를 견인하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역사의 현장에서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그 주역 중 한 사람이 한 꺼풀의 세월을 보내고 새롭게 찾아 낸 것이 삶의 문화이며 부엌이었고 조선의 아낙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부엌에서 그는 어머니로서 ‘참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리자고 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새로운 역사 읽기에 들어갔고 그래서 발견한 것이 바로 ‘어머니가 꾸려 온 부엌’이라는 공간이다. 그 새로운 영토에서 그는 새로운 문화의 씨앗을 생성하고 그 씨앗을 뿌리고 그걸 장차게(곧고도 길다-편집자 주) 길러서 새로운 꽃과 새로운 열매를 수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자고, 개간하자고 그리고 거기에 씨앗을 뿌리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삶의 문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똑순이 이영미가 무슨 웰빙이다, 황토다, 자연이다, 시골이다, 뭐다 뭐다 하면서 천민자본주의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자연 속으로 들어갔고, 그 시골에서 아주 오래된 부엌을 발견했고 거기서 조선의 아낙이 되어 그 조선의 아낙이 했던 것처럼 밥상을 차리자는 것이다.
 
하여간, 팔방미인 이영미를 따라 어머니의 부엌으로 들어가 밥상을 차려보기로 하자.   우선 그는 봄볕이 떨어져 있는 들판을 쏘다니며 봄나물을 뜯어보잔다. 냉이도 캐고 두릅도 따고 취나물을 뜯잔다. 그런 걸 어떻게 하냐고? 사실은 팔방미인 이영미도 제대로 아는 건 없단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거나 쫓아간다. 아마 여러분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시시콜콜 가르쳐 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다르다. 재주꾼 이영미는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가르침과 훈계와 조언 그리고 더러는 남편의 잔소리 같은 걸, 여러분처럼 듣기 싫다고 퉁퉁거리거나 “뭐 그런 것 좀 알았다고 잘 난 체야…”이렇게 하는 법은 없다. 그럴 때마다 이영미는 그 분들의 말씀을 귀하게 갈무리하고 시간을 두고 숙성시키는 지혜로움을 발휘해 낸다. 그래서 얼마가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또는 신랑으로부터 ‘어! 정말 이거 맛있는데…’하는 소릴 받아 내고야 만다. 이 얼마나 멋진 삶의 ‘숙성 법’인가. 
 
하여간, 이 책에서 팔방미인 이영미는 푼수꾼이다. 엄마한테 아양떨면서 엄마 재주를 모조리 뽑아내서 제 머리 속에다 갈무리를 한다. 진달래 화전 부치는 법이나, 쑥 버무리를 만드는 법이나 닥치는 대로 뽑아낸다. 그래서 된장 고추장에 장아찌를 박아 넣고 김장김치를 담그고, 마치 경상도내기라도 된 양 산초를 따다가 된장에 넣어 맛을 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전라도 사람들이 밥도둑 놈이라고 자랑해 마지 앉는 간장게장 같은 전문요리까지 제법 그럴싸하게 제작해서 밥상에 올려놓는 그런 이영미를 따라 삶의 멋이라도 한 번 내 보라고…으쓱댄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고 푼수를 떨어댄다. 
 
한 창 신이 났던지 이영미는 뭐 이건 여자만의 이야기도 아니란다. 변한 세상을 탓하고 원망할게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들도 한 번 멋지게 팔방미인 이영미를 따라 이영미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고 퇴근길에 골목시장이라도 들려서 “아저씨 굴 한 박스하구 대파 한 단 하구 마늘 글구 초고추장 작은 병 이렇게 좀 챙겨 주세요” 그러면 “허허! 미영아빠가, 웬일이셔”할 것이다. 집에 와서는 슬그머니 부엌에 들어가서 ‘환상적인 굴튀김’ 한 접시를 제조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자! 식사덜 하러 오세요” 이렇게 가족들을 불러 보라, 깜짝 놀랄 것이다. 아내와 가족의 사랑이 뭔지 듬뿍 받아 보라. 음식이 맛없다고 툴툴거리던 집안 식구들의 불만 덩어리는 어느새 봄눈처럼 녹아 내리고 사랑과 존경과 행복이 집안 구석구석에 철철 넘치고 웃음꽃이 만발할 것이다. 그게 바로 새로운 세상이고 또 오래된 미래가 아니던가. 하여간, 뭐 아름다운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그렇다. ‘지금’ ‘당신’이 살아가는 바로 ‘거기’, 그 삶의 공간에서 ‘삶의 문화로 아름다운 세상을 시작하라’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3/29 [15:05]   ⓒ 디지털광진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