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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이야기]한다리 내시촌 이야기2
향토사학자 김민수. 아차산 자락 한다리 내시촌에 얽힌 이야기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07/07/07 [15:51]


금지된 사랑은 불행의 씨앗을 잉태하고 
  어느 깊은 밤이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빠져 나온 두 사람은 노상탕의 집으로 빨려 갔다. 그 날 심참판은 사랑방의 여닫이 한 짝을 열었다. 대문을 향하여 눈 위에 찍힌 심술이의 발자국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을 닫았다.

 한봉이 누나는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서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심술이가 들어오자, 두 손을 잡고 앉혔다.
  “심술아, 어떡하면 좋으니, 애를 가진 것 같애.”
  멍하니 바라보는 심술이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헛구역질이 났어. 그래도 별 걱정 하지 않았는데, 그거 있지, 여자가 한 달에 한번씩 하는 거 있지, 그걸 안 해, 임신한 게 확실해, 입덧이었어.”
  심술이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지를 몰랐다. 생각 같으면 ‘왜 바보 같이 애를 뱄어’ 하고 나무라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잘 했어’라고 칭찬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막막했다.
  “어떻게 하지?”
  겨우 같이 걱정한다는 맞장구 몇 마디로써 한봉이 누나에게 떠 넘겼다. 한봉이 누나는 잡은 손을 놓고 심술이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혼인해서 애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그렇지?”
  한봉이 누나는 어린 심술이에게서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심술이를 편안하게 해 주고 싶었다.
  “심술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무슨 방도가 있을 거야, 누나가 찾을게.”
  한봉이 누나는 심술이의 머리를 꼭 껴안아 주었다. 심술이는 안긴 채 나직이 말했다.
  “그럼 오늘은 그만 돌아가야 해.”
  한봉이 누나는 심술이를 살짝 밀고 나서 빙그레 웃었다.
  “임신한데 또 임신하지 않아. 얼마나 가슴을 졸이면서 만나는데.” 
  그 날밤 한봉이 누나의 몸은 뜨거웠다. 쉴 새 없이 비벼대면서 쾌감에 겨운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헤어질 때에는 앞으로의 방도를 세울 때까지 만나지 않기로 하였다.

  하님이의 기별을 받고 다시 만난 날은 캄캄한 그믐밤이었다. 한봉이 누나는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심술이가 마주 앉자, 고개를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심술아, 우리 도망가야 해.”
  심술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고통도 그러하거니와 달리 도망간다고 하여도 어디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 추운 겨울에,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눌러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내시촌의 숨막히는 적막은 질식할 것 같았다.
  “심술아 애를 떼는 것도 생각해 봤어. 약방문(藥房文)을 얻으려면 할멈한테 부탁해야 하니, 그것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눈밭에 뒹굴 수도 없잖니.”

  한봉이 누나는 심술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방안에 깔려 있는 어둠을 걷어내려는 것 같았다.
  “심술아, 애를 떼어낸다고 한들 그전처럼 지낼 수 있겠니, 온통 우리 눈치만 살피는 것 같애, 언젠가 터지고 말 거야. 그러고 말이야……”
  한봉이 누나는 고개를 돌리고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봄이 되면 큰마님 탈상을 치를 거 아냐? 그럼 너는 새색시 데려올 거고, 그럼 좋겠다. 그렇지? 난 그 꼴 못 봐,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지.”
  어둠 속에서도 한봉이 누나가 입술을 모질게 다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냐, 아냐, 절대 아냐, 그런 일은 없어. 그러지 마, 누나 없이 못 사는 거 다 알잖아.”

  심술이는 무릎을 세워 다가섰다. 그리고 한봉이 누나의 두 손을 잡고 울먹였다. 금새 한봉이 누나의 얼굴이 밝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떠나야 해. 할멈 고향이 금강산 너머 원산이래. 동해 바닷가인데 그렇게 살기 좋데. 사람들이 까다롭지 않고, 여러 군데서 모여들어서 차별도 없단다.”
  “그렇게 멀리 갈 수 있어? 겨울인데, 누나는 홀몸도 아니잖아?”
  “응, 그래. 그래서 가는 데까지 가는 거야. 강원도 땅에만 들어서면 돼. 철원까지는 눈대중으로 갈 수 있어. 거기서 머무르면서 살아도 되고, 더 가도 되고.”
  한봉이 누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심술이는 별천지가 열리는 것처럼 가슴이 트였다. 한봉이 누나는 며칠 동안 세웠던 계획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들으면 들을수록 심술이가 걱정하였던 것들이 매듭이 풀리듯 사라졌다.

  “심술아, 그래서 아주 간편해야 돼, 돈과 노리개만 속곳 속에 넣어서 꿰맬 거야. 쓸 돈은 몸 속에 차면 돼. 너가 입을 두루마기도 겹겹이 잘 누벼 놨어. 눈길이래서 덧버선도 몇 켤레 더 만들었고, 너는 가죽신만 여분으로 하나 더 챙겨 둬.”
  심술이는 한봉이 누나 혼자서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거들어 주고 싶어서 한마디 꺼냈다.
  “눈길이래서 설피(눈신발)도 있어야지?”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입춘이 지나서 떠날 거야. 설 전에 말이야. 우리 애를 배고 큰마님의 차례 상을 차릴 수는 없잖니. 그땐 눈이 별로 없을 거야.”
  한봉이 누나는 다시 한번 중요한 계획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밤에 만나기로 하였다. 심술이는 뭔가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봉이 누나를 끌어안고 싱겁게 농담했다.
  “이렇게 누르면 뱃속의 우리 아기가 싫어할 걸?”
  “아니, 그렇지 않아. 아버지가 오셨다고 기뻐할 거야.”
  한봉이 누나의 붉은 얼굴빛이 가슴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 날밤 심술이는 모든 것을 한봉이 누나에게 바치고 싶었다. 그래서 힘껏 그리고 뜨겁게 안았다.

한봉이와 심술이는 도주 계획을 진행시키고 
  어느덧 입춘이 왔다. 얇은 얼음장 밑으로 도란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 개울을 따라 굽이굽이 뻗은 길과 잘 나눠진 논두렁이 한다리 마을을 다시 찾아 주었다. 내시촌도 소금움막의 거적때기 문을 걷어 올리고 평부솥 아궁이를 손보고 있었다. 토막나루에서 서해 바다까지 뱃길이 열려서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바다소금을 싣고 와서 꽃소금으로 만들 양이었다. 심술이는 무엇 하나 잡히는 일이 없었다. 책을 읽기보다는 서성거리는 일이 더 많아졌다. 방을 나와서도 외양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일 없이 여물거리 볏짚을 썰거나 누렁이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갑갑한 마음을 달랬다. 어쩌다가 개울 길을 따라 하님이가 종종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가슴에 길이 뚫리는 것 같이 후련했다. 오직 한다리 마을의 개울 길만이 심술이의 희망이었다.

  설 엿새 전날 밤에 둘이 만났다. 서로 핼쑥해져 있었지만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한봉이 누나는 벽장문을 열었다. 거기서 꺼낸 누빈 두루마기를 심술이에게 입혔다. 그리고 발목에는 각반을 채웠다. 띠각반이 아니라 통각반이었다. 털모자까지 씌우고는 한번 돌아서게 하였다.
  “됐어, 가죽신을 잘 챙겼지?”
  “응.”
  심술이는 어머니에게 내맡긴 응석둥이처럼 대답했다. 한봉이 누나는 애써 방긋 웃어 보였다. 다시 벽장 속에서 보따리들을 꺼냈다. 큰 보따리에는 옷가지들이 채곡채곡 개여 있었다. 그것을 속곳은 속곳 대로, 겉옷은 겉옷 대로 따로따로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서는 거기에 맞는 기름종이로 만든 봉지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둥이를 끈으로 묶었다. 다른 크고 작은 보따리에서는 먹거리들이 들어 있었다. 잘 말린 육포와 양미리(생선), 그리고 미역귀까지 있었다. 다른 보따리에서는 곶감 한 접을 꺼내서 보여 줬다. 먹거리 역시 따로따로 기름종이 봉지에 넣어서 주둥이를 묶었다. 그것들을 바랑(배낭)속에 꼭꼭 집어넣었다.
  “짊어지고 갈 수 있지? 이러면 눈비가 와도 끄떡 없어.”
  한봉이 누나는 바랑 끈을 당기면서 말했다.
  “이것 뿐이야?”
  “응 이거면 충분해. 나는 여기 보따리 하나 더 있어. 냄비며 밥 그릇 따위야. 깨질까 봐서 사기 그릇은 뺐어. 이건 비를 맞아도 괜찮아.”
  한봉이 누나는 잘랑거리는 보따리를 벽장 속에 도로 넣었다. 심술이도 바랑을 들어서 벽장 속에 넣어 주었다.

  둘은 마주 앉았다. 한봉이 누나가 심술이가 입은 누빈 두루마기의 옷깃을 여미면서 말했다.
  “내일 이대로 입고 나오면 돼. 가죽신 신고, 여분으로 남은 가죽신 가져오는 것 잊지 마. 바랑 속에 넣으면 돼, 알았지?”
  한봉이 누나는 심술이가 미덥지 않아서인지 다시 한번 다짐시켰다. 심술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돈이나 노리개들은 내일 입을 내 속곳 속에 넣어서 아예 꿰맸어. 쓸 돈만 네가 갖고 있으면 돼. 우리 살기에 충분해. 난 일이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 해. 걱정하지 마. 모두 잘 될 거야.”

  그렇다. 한봉이 누나는 보이지 않는 새장 속에 갇혀 있었다. 내일이면 훨훨 날 것이다. 심술이는 한봉이 누나가 독수리처럼 큰 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독수리의 등에 올라 타서 세상 어디든지 날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불현듯 하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날아가는 우리들을 따라오다가 멍하니 개울 길에 서 버린 하님이었다.
  “우리만 가면 돼? 우리가 떠나고 나면 하님이는 어떻게 되지?”
  심술이는 잊었던 기억을 되찾은 듯이 잽싸게 물었다. 한봉이 누나는 말이 없었다. 크게 한번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님이 때문에 걱정이야. 우리들의 일을 모두 알잖니, 모르게 내빼기도 그렇고, 알게 할 수도 없고.”
  “그럼 하님이가 우리 애 가진 것까지 다 알아, 그래?”
“알 거야, 안방에서 입덧하는 것도 보았고 매양 듣는데, 하님이도 열 살이야. 여자 열 살이면 아는 건 다 알아, 얼마나 눈치가 빠른 아인데.”
  한봉이 누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심술이의 무릎에 오른손을 얹혔다.
  “너를 들여보내고 난 다음 내가 할 일이 바로 하님이 문제였어. 어떻게 될 거야. 내일 밤 안방에서 챙길 게 많아. 하님이가 있으면 아무래도 분답해. 걔가 어떤 짓을 할 지도 모르고, 울며 매달려도 그렇고.”
  “어데로 영 보내 버리려고.”
  “아니, 보내긴, 걔가 어딜 가. 의지할 데가 없어 먼 친척밖엔.”
  한봉이 누나는 벌써 하님이에 대한 뒷일을 정해 놓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내일 걔 친척집으로 보내려고 그래. 설 쇠고 오라고.”
  “먼 친척인데 좋아해?”
  “응, 쌀이며 제수(제사제물) 거리들을 잔뜩 짊어지워서 보낼 거야. 돈도 좀 보낼까봐. 그 친척이 하님이를 불쌍하다고 늘 걱정해 준다고 들었어.”
  “그럼 하님인?”
  심술이는 쉴 틈 없이 다그쳐 물었다. 한봉이 누나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심술이가 하님이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이 못내 섭섭한 듯 보였다.
  “알아. 다 생각해 뒀어. 우리가 챙긴 패물말고 나머지 중에서 좋은 걸로 몇 개 골라서 하님이 줄 거야. 그래도 많이 남아. 새 마님이 다시 들어와서 갖던, 할멈이 갖던, 그건 다 미련 없어. 우리 살 것만 가지고 가면 돼.”
  말을 마친 한봉이 누나는 금새 새치름해져 있었다. 심술이는 미안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한봉이 누나의 말꼬리를 이었다.
  “그런데 하님이가 패물 좋은 걸 알까?”
  심술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알아, 내가 노리개 몇 개를 안골 새 부잣집 안주인한테 보내서 값 쳐 주는 대로 받아 가지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적이 더러 있어, 할멈이 다리를 놔 줘서.”
  한봉이 누나는 한푼이라도 더 챙기려고 패물까지 팔았었다. 그것도 모르는 심술이가 서운했다.
  “그래서 하님이한테는 쉽게 돈이 되는 금붙이만 주려고 그래. 금비녀, 금반지 그런 것들 말이야. 그리고 걔가 갖고 싶어했던 노리개도 몇 개 있어.”
심술이는 하님이 때문에 한봉이 누나의 비위를 거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바심이 나서 다시 혼잣소리를 했다.
  “그걸 어디다 숨기지 어린 게?”
  “알아서 잘 숨길 거야. 영특한 아이니까.”
  “내일 언제 보내?”
  심술이는 이왕 내킨 김에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한봉이 누나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녁상까지 차려놓고 가려면 너무 늦어. 밤중에 찾아가면 친척들이 놀랠 테고, 점심상을 물리고 나서 아무도 모르게 보낼 거야. 여기 노상탕의 집에서 보내면 돼.”
  “그럼 저녁상은?”
  “내가 들고 가. 마지막으로 대감도 뵙고……”

  한봉이 누나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서럽게 보였다. 그야 그럴 것이다. 살 한번 대보지 않았지만 명색이 남편이 아닌가. 머리를 얹어 준 남편에 대한 마음의 하직 인사를 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심술이는 불쌍한 한봉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그래도 종종걸음으로 샛문을 들락거리던 하님이의 모습을 떨굴 수가 없었다.
  “설 쇠고 와서 아무 것도 모르는 하님이가 혼날 거 아냐?”
  “심술아 우리 일도 태산 같애. 한다리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도 그렇고, 누굴 걱정할 새가 없어. 우리와 우리 애만 걱정해야 돼. 알았지?”
  한봉이 누나는 철없이 구는 심술이를 타일렀다. 그리고 나직이 다시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가서 자자. 내일 밤새 걸어서 동틀 쯤에는 포천까지 가 있어야 돼. 마음 단단히 먹어, 심술아.”
  심술이도 뒹굴 마음은 전연 없었다. 그러나 불안했다. 한봉이 누나와 이렇게 있는 것도, 다시 사랑채로 건너가는 것도 모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심술이는 벌떡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한봉이 누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같이 따라 일어서는 한봉이 누나에게 힘차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누나를 업고라도 갈 테니까.”
  “그래, 심술아, 심술이는 누나 생각만 하지, 그렇지?”
  “말이라고 해, 난 누나 없인 못 살아. 누나 뿐이야.”
  한봉이 누나는 잠시 심술이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심술이는 그런 한봉이 누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한봉이와 심술이의 도주 계획은 한다리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다음날 행랑채에서는 오랜만에 사람들이 붐볐다. 사람들이라고 해야 뱃사람들이었다. 설을 쇠고 나면 바로 배를 띄워 바다소금을 거둬들일 채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토막나루에 가서 돛배까지 손보고 왔다. 점심을 들고 그들은 떠났다. 유상책과 허상세가 사랑채를 드나들었다. 그때까지도 하님이의 종종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심술이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러나 졸립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외양간을 깨끗이 치웠다. 구유에 여물을 채워 줬다. 여물을 사근사근 씹는 누렁이를 보면서 설움에 복받쳤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이다. 심참판 댁에 꿈을 심어 줬던 내가 도리어 망조(亡兆)만 남기고 떠나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인지 하님이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다렸다. 하님이의 모습을 보면 그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느새 사랑채의 마당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유상책과 허상세도 발길을 끊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하님이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견디기 어려운 적막이 흘렀다.

  심술이는 이렇게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러면 애써 버텨온 한봉이 누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나무랐다. 그래서 우리는 떠나야 한다. 떠나는 것만이 얽힌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 길이 험하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뜨거운 마음을 합치면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리고 나서 저녁상을 들고 올 한봉이 누나를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동지를 지나서인지 낮이 많이 길어졌다. 신시(申時:오후 5시)를 넘길 쯤이지만 날은 훤히 밝았다. 어둡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해를 묶어 놓았던지,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간혹 바람에 문풍지가 울지 않았다면, 내시촌은 모든 것이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져 가면서 가까이 오고 있었다. 분명 개울 길을 따라서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욕지거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불안한 예감은 들어맞았다. 욕지거리를 맞받아 치는 허상세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순간 심술이는 온 몸이 풀렸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이다. 몰려오는 대여섯 사람들은 몽둥이와 괭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을 대문에서 막아선 사람이 허상세였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또한 패거리들이 개울 길을 따라서 오고 있었다. 아녀자들까지도 허겁지겁 몰려오고 있었다. 앞선 사람은 동아줄 한 타래를 어깨에 메고 낫까지 들고 있었다. 그 무리 사이에 하님이가 있었다. 예쁜 색동옷을 입고 있어서 금방 눈에 띄었다. 친척인지 모를 아녀자의 손에 이끌려 띄엄띄엄 걸어오는 하님이는 겁에 질려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느라고 눈만 말똥거렸다. 하님이의 옆에는 몹쓸 놈이 붙어 있었다. 어금니를 깨물고 멍석말이를 당했던 몹쓸 놈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오고 있었다. 왼손에는 엿가위, 오른손에는 인두를 들고 춤이라도 출 듯이 내저으면서 오고 있었다. 이들까지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유상책도 나와서 막아섰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유상책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무엇인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었다.
  “어딘 어디요. 심참판 댁 연놈이 붙어먹은 데지.”
  앞장 선 사람이 대뜸 덤벼들 듯이 소리쳤다.
    “이놈이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어.”
  맞받아 치는 유상책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러자, 몰려든 사람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내 뱉었다. 개 같은 년, 화냥년, 염병할 년……, 아낙네들의 한봉이 누나를 향한 욕지거리는 쉴 새가 없었다. 그때 동아줄을 어깨에 멘 남자가 낫을 휘두르면서 외쳤다.
  “연놈을 끌어내어 조리돌립시다.”
  이제는 끌어내라는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또한 남자가 나섰다.
  “넘겨주지 않으면, 우리가 들어가서 끌어냅시다.”
  그는 허상세를 밀치고 유상책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게 양반 집 법도냐, 이 망할 놈들아. 포청이고 어데고 가자, 육시랄 놈들, 이 양반 놈들아.”
  허상세가 달려들어 겨우 멱살을 풀었지만, 유상책은 풀린 멱에 손을 대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됐다. 됐어. 조용히들 하거라.”
  뒤에서 나서는 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아낙네에게서 하님이의 손목을 넘겨받고 나섰다. 큰일 때마다 심참판을 직접 만났던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유상책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손에 잡힌 하님이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꺼냈다.
  “영감, 이렇게 떠들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심참판 댁이나 우리 동네의 사활(死活)이 걸린 일입니다. 어서 들어가서 대감을 뵙게 해 주십시오.”
  유상책은 입을 다물고 가슴을 펴 올리며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이내 콧숨 소리가 길게 빠져나갔다.
  “알았네, 잠시 여기서 기다리게.” 
  허상세가 대문을 밀어 열었다. 유상책의 뒤를 따라서 모두가 대문턱을 넘어서 사랑채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유상책은 심참판에게 아뢰기가 민망했다.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한다리 사람들을 보고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유상책이 머리를 치켜세우고 아뢸려고 하는 순간, 사랑방의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이 한꺼번에 열렸다. 오른손으로 미닫이문을 밀치고 왼손으로 여닫이문의 고리를 잡은 심참판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대로 여닫이문의 고리를 잡은 채 일어섰다. 유상책이 얼른 섬돌에 올라서서 심참판을 부축했다. 심참판은 툇마루에 나와서 섰다. 오른손으로 처마의 서까래에서 내린 드림줄을 잡고 한동안 툇마루에 그대로 섰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투에서 삐져 나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과 해골에 살가죽을 씌운 몰골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깊숙이 박힌 두 눈만이 번뜩이면서 살아 있었다. 심참판은 살아 있는 귀신이었다. 심참판은 조심스럽게 섬돌에 내려섰다. 그대로 툇마루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상책은 마당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제서야 노인은 나서려고 하였다. 노인에게 손을 잡힌 하님이가 나가지 않으려고 팔을 꼬면서 손을 빼려고 하였다. 노인은 도로 하님이의 잡은 손을 전의 아낙네에게 넘겼다. 그리고 서너 걸음 나서서 심참판에게 인사를 드렸다.

  “대감마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입에 담지 못할 일이……, 그것도 대감 댁에서 일어났습니다.”
  노인은 뒤돌아 서서 하님이를 쳐다보았다. 하님이는 얼른 아낙네의 치마폭 뒤로 숨었다.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감 댁의 몸종이 설을 쇠러 동네 친척 집에 들렸습니다.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아서 기뻤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종 아이가 몸속 깊숙이 감췄던 패물 주머니를 꺼내서 맡아 달라고 하였답니다. 친척은 열어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붙이와 값비싼 노리개들이었습니다. 필시 훔쳐온 것이라고 생각한 친척은 자초지종을 캐물었지만 아리송한 이야기만 늘어놓더랍니다. 대감 댁이 어떤 집안입니까?. 같이 경을 칠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은 친척은 우리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우리들도 모였고, 몸종 아이도 불러들였습니다. 달래기도 하고 다그쳐서 전말(前末)을 알아냈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노인은 뒤돌아 서서 마당에 모인 한다리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지긋이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심참판에게 다시 말했다.
  “아니, 어미와 자식이 붙어먹다니요? 세상에, 그것도 대감 댁에서요. 그대로 두면 대감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이요. 우리 마을 또한 혁파되어 모두 쫓겨나거나 부역살이로 끌려갈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때는 그랬다. 부모를 죽이거나 가족 사이에 음란한 일이 있으면 강상죄(綱常罪)라고 하여, 그 동네 모두에게 죄를 물었다. 그때까지도 심참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노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보여드려라. 패물 말이다.”
  아낙네가 하님이의 손을 놓고 대신 팔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치마를 걷어 올려서 속곳을 뒤척였다. 그리고 주머니를 꺼냈다. 하님이를 끼운 팔 때문에 이빨까지 사용하여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금붙이들과 노리개들이 뒤섞여서 광채를 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참판은 물끄러미 보더니 손등을 밀며 내저었다. 아낙네는 다시 이빨까지 사용하여 주머니의 끈을 묶었다. 얼른 속곳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잽싸게 하님이의 손을 꽉 잡았다. 아낙네에게는 패물 주머니도 하님이도 모두 보물단지였다.

  “알기로는 연놈들이 오늘 밤에 줄행랑을 칠 모양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다른 고을에 가서 이런 일이 발각되었다면, 얼마나 큰 낭패였겠습니까? 오늘 연놈을 끌고 다니며 동네 한 바퀴를 조리돌리고 나서 궁형(宮刑)을 치룰려고 합니다.”
  섬뜩한 일이었다. 죄인들을 묶어서 동네를 돌게 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멍석말이 정도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궁형은 달랐다. 남자의 성기를 자르고, 여자의 음부를 달군 인두로 지지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은 동네의 중대사이므로 심참판인들 막을 명분이 없었다. 더군다나 심참판은 망신을 당한 당사자였다.
  “대감, 연놈들의 죄가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어서 연놈을 내주십시오. 대감께서 거북스러우시다면 우리들이 끌어내겠습니다.”

  노인은 기세가 등등했다. 기세를 타서 한다리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점점 거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더러는 땅바닥을 탕탕 찧으며 호통을 쳤다. 급기야 낫을 들고 툇마루 기둥을 마구 찍어 대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심참판은 말이 없었다. 내민 두 입술을 손가락에 끼워 누른 채 마당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윽고 심참판은 손바닥을 마주하여 까닥거렸다. 유상책과 허상세가 잰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들리지는 않았다. 유상책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샛문으로 나갔다. 허상세는 마당의 사람들을 제치고 심술이의 방 앞에 섰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술아, 심술아!”
  허상세의 목소리는 울음이었다. 가만히 미닫이문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여닫이문이 열리면서 심술이는 툇마루에 나와 섰다. 옷고름도 풀린 채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달려와서 심술이의 저고리를 낚아챘다.
  “이 더러운 놈, 어미하고 붙어먹은 놈!”
  심술이는 마당에 내동댕이쳐졌다. 간신히 윗몸을 일으켜 꿇어앉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또 심술이를 걷어찼다. 심술이는 다시 넘어졌다. 이번에는 한쪽 무릎을 깔고 일어나 반쯤 꿇어앉았다. 바로 허상세가 막아 서 주었다.


두 사람은 궁형을 당할 위기에 빠지고, 이들을 광에 가두는 심참판 
  유상책과 그의 아내 할멈이 안채에서 나와서 샛문 앞에서 마주 보고 섰다. 그 사이로 한봉이 누나가 걸어 나왔다. 머리에는 조바위(귀, 뺨 가리개)를 썼고, 하얀 소복차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와서 심술이 옆에 다소곳이 꿇어앉았다. 이때 우악스럽게 생긴 아낙네가 달려들어 조바위를 낚아챘다.
  “이 년, 상판때기나 좀 보자, 이 잡년아.”
  얼른 허상세가 돌아서서 밀어냈다. 밀려가면서도 조바위를 낚아챈 아낙네는 소리 소리를 질렀다.
  “우리 서방은 네 년 집에서 맞아서 지금 뒷간 출입도 못한다. 이 개 같은 년아. 갈기갈기 찢어 죽일 년, 이 양반 년아, 양반 년이 새끼하고 붙어먹냐? 이 놈들아 해 보자.”

  허상세에게 밀려가는 아낙네는 여기서 멍석말이를 당했던 셋 중 한 놈의 아내였다. 술렁이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자들은 숨을 죽였지만, 아낙네들에게서 별의별 욕지거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뻔뻔스러운 년, 화냥질한 년, 서방 잡아먹을 년, 그것도 모자라서 침까지 뱉었다.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서너 노인들이 나서서 한다리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유상책과 허상세도 심참판 가까이 와서 옆으로 섰다. 다시 전의 노인이 나서서 말했다.

  “대감마님, 크게 벌리고, 오래 끌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빨리 치러서 동네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연놈을 우리에게 넘겨주십시오. 조리돌림부터 한판 벌리겠습니다.”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아줄 타래를 어깨에 멘 사람이 낫을 휘두르며 뛰쳐나왔다.
  “조리돌림은 무슨 조리돌림입니까. 날도 저무는데, 동네 모일 사람은 다 모였습니다. 뭘 잘한 일이라고 이웃 동네까지 나발 불고 다닙니까? 바로 연놈을 자르고 지집시다.”
  그는 금방이라도 궁형을 치룰 것 같이 동아줄 타래를 심술이와 한봉이 누나 앞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허상세를 향하여 소리쳤다.
  “뭣하시오, 영감, 영감은 얼른 화롯불이나 내오시오. 인두 달굴 화롯불 말이요.”

  모두들 술렁거렸지만,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허상세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심참판과 유상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예 할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심참판은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었다. 섬돌을 디딘 오른발만 쉴새 없이 다독거렸다.
  “덕배 어멈, 그 아이를 내오게, 앞으로.”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하님이의 손을 잡은 아낙네가 그대로 끌고 서너 발자국을 옮겨왔다. 하님이의 친척 아낙네가 덕배 어멈인 모앙이다. 인두와 엿가위를 든 몹쓸 놈도 뒤따라 나왔다. 하님이는 아낙네에게 잡힌 왼손을 빼기 위해 오른손으로 아낙네가 잡은 손가락을 젖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노인까지 하님이의 오른 손목을 잡아버렸다. 하님이는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얘야, 사실대로 말하면 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도 주인마님처럼 불에 지질 것이다. 알겠냐. 아까 이야기한 대로 다 이야기하겠다고 했지? 그렇게만 말하면 된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너를 지켜주고 잘 살게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뢰어라.”

  노인은 하님이의 손을 놓고 달랬다. 몹쓸 놈이 하님이 앞에서 왼손에 든 엿가위를 흔들었다. 그리고 무서운 흉내를 내면서 웃었다. 하님이는 겁에 질렸다. 입도 눈도 벌어진 채 다물지 못했다.
  “연놈이 어떻게 만났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대감마님께 소상히 아뢰어라, 어서.”
  노인이 소리쳤다. 하님이는 앞뒤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울어버렸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뚝 그쳐, 말하지 않으면, 너도 한패다. 달군 인두로 지질 테다.”
  노인이 윽박지르자, 하님이는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겁에 질린 숨소리가 헉헉댔다.
  “연놈이 어느 때 만나더냐?”
  노인이 다그쳤다.
  “밤에요. 한밤에요.”
  “어디서?”
  “노상탕의 집에서요”
  “무슨 짓을 하더냐?”
  하님이는 멈칫했다. 마님과 심술이를 언뜻 쳐다보았다. 그리고 윗몸을 마구 흔들었다.
  “몰라요. 나는 몰라요. 군불만 땠어요. 그냥 왔어요.”
  “모른다고, 요것도 한패구나.”
  몹쓸 놈이 인두를 하님이 눈앞에서 좌우로 저으면서 내뱉었다. 하님이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노인이 몹쓸 놈을 밀쳤다.
  “그만 둬라.”
  그리고 나서 노인은 다시 하님이에게로 와서 허리를 굽혔다. 울음을 들여 마시는 하님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도 저렇게 땅바닥에 꿇어앉을 테냐? 그리고 벌겋게 달군 인두로 지지면 시집도 못 간다. 아까 동네에서 다 안다고 했지. 네가 얘기하지 않아도 우린 다 안다. 너의 입으로 털어놔야 너는 한패가 아닌 거여. 마님이 어떻게 됐다고 했지? 어서 말해라.”
하님이는 헉헉대는 숨소리에 맞춰서 띄엄띄엄 말했다.
  “마님이…… 애를…… 뱄어요.”
  “그래서?”
  “도망갈려고요……, 벽장 속에…… 다…… 숨겨 뒀어요.”
  몹쓸 놈은 신바람이 났다. 엿가위와 인두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하님이에게 다시 다가섰다.
  “연놈이 어떻게 뒹굴더냐? 홀랑 벗고 그렇지?”
몹쓸 놈이 웃는 얼굴을 보고, 하님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심참판이 오른손 손등을 서너 번 밖으로 밀었다.

  “아이를 물려라.”
  유상책이 소리 쳤다. 아낙네는 재빨리 하님이를 끌고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로 물러났다. 잠시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시끄러워졌다. 노인은 두 손바닥을 여러번 아래로 내리면서 소리쳤다.
  “조용히들 하게, 조용히들 해, 결판을 내야지.”
  한다리 사람들이 진정하는 낌새를 보이자, 노인은 심참판에게 보란듯이 대들었다.
  “포청으로 가서 두 번 욕을 보시겠습니까? 여기서 끝을 내겠습니까?”
  심참판은 모든 게 정지되어 있었다. 다만 눈을 한번 떴다가 다시 감았다. 노인은 화가 치밀었다.
  “연놈을 묶어라. 어서 묶어라.”
  서너 명의 남자들이 뛰쳐나왔다. 이에 맞서서 유상책과 허상세도 막아섰다. 그러나 힘에 밀렸다. 밀리면서도 유상책은 호통을 쳤다.
  “이 놈들 대감께서 말씀이 없으신데 웬 행패냐?”
  “둬라, 묶게 둬라.”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심참판의 목소리가 마당에 깔렸다. 유상책과 허상세는 손등을 밖으로 내젓는 심참판을 보고 나서야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낫을 땅바닥에 내 팽개친 사람이 동아줄 타래를 풀었다. 거드는 사람과 같이 심술이를 묶었다. 먼저 뒷짐을 지워 두 손을 묶었다. 그리고 나서 몸통까지 꽁꽁 묶었다. 뒷결박이었다. 이들은 낫으로 동아줄을 자르고 나서 한봉이 누나에게 다가섰다. 이때 유상책이 나섰다. 그리고 동아줄을 낚아챘다.

  “둬라. 마님은 우리가 묶을 것이다.”
  의아해 하는 그들을 향하여 다시 한번 말했다.
  “너희보다 더 단단히 묶을 것이니, 봐라.”
  유상책은 한봉이 누나를 묶기 시작했다. 소금가마를 묶을 때보다 더 단단히 묶었다. 마지막 매듭을 지을 때에는 무릎을 한봉이 누나의 등에 대고 힘껏 조였다. 한봉이 누나의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묶인 두 사람을 마당 한가운데 두고 모두들 물러섰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의 적막이 잠시 흘렀다. 노인이 나섰다.
  “대감마님, 대감께서 괴로우신 심정을 저희들이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만, 세상을 사는 데는 법도가 있지 않습니까? 전번 사소한 일에도 양주 관아가 아니라 포청까지 끌려가서 동네 사람들이 큰 욕을 보았습니다. 이런 패륜은 입에 담기 부끄러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입니다. 지금 궁형을 바로 치러서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 동네가 편안할 수 있습니다.”

  예의를 갖춰서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노인의 말속에는 사무친 원한이 서려 있었다. 그때 심참판이 입을 열었다.
  “괴로운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니 견디기가 어렵구나. 내 저년의 지아비이다.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주고 싶다. 이 일을 너희들이 해 준다고 하는데 내가 되려 고맙다고 해야지.”
  심참판은 다문 입술의 한쪽을 치켜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몹쓸 놈이 뛰쳐나왔다.
  “대감, 대감 저 연놈의 아랫도리는 쇤네에게 맡겨 주십시오. 대감마님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몹쓸 놈은 엿가위와 인두를 서로 부딪혔다. 쨍, 쨍 소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따라 웃는 사람은 없었다.
  “고맙다, 고맙구나.”
  심참판은 툇마루 가장자리를 누르면서 섬돌 위에 섰다. 유상책이 부축하려고 했지만 손을 저었다. 꼬장꼬장하게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치는 심참판의 광채는 서늘했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궁형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저 연놈의 궁형만을 치르고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다시 두었다가 허리를 두 동강이 내어야 속이 시원하겠다. 내 지금까지 궁형 치를 일만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 내 저 년을 데려올 때 저 년의 오라버니에게 논마지기도 넉넉히 떼어 주었다. 그 뿐이랴……, 하여간 아녀자의 행실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 년의 친정에 알리는 것이 법도다. 내일 날이 새기 전에 유상책은 저 년의 오라버니를 끌고 오너라. 그리고 아무리 사삿집(私家)에서 치르는 궁형이라고 하지마는 어찌 사람이 사지(四肢)를 붙들고서 치르겠느냐? 내일 일찍 조반을 먹고 너희 두 놈은 이리로 오너라. 허상세가 시키는 대로 형틀을 만들어라. 품삯은 지고 가기 힘들 만큼 넉넉히 주겠다. 연놈을 곳간에 쳐 넣어라. 통쇠(자물·열)를 채워라.”

  두 놈은 몹쓸 놈과 동아줄을 메고 온 놈이었다. 말을 마치자, 심참판은 드림줄을 잡고 툇마루에 올라섰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바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들 넋이 없었다. 심참판의 말은 하나도 그릇됨이 없었다. 과연 참판이었다. 여기저기서 수근거렸다. 결국 심참판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소리 쳤다.
  “연 놈이 밤새 혀를 깨물고 자결이라도 하면 낭패야. 재갈을 먹여.”

  모두들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머릿수건을 동여맨 사람이 나왔다. 자기의 머릿수건을 풀었다. 이빨을 들이대고 찢었다. 머릿수건은 ‘찍’ 하는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다시 한번 아래를 잡고 찢어야 떨어질 만큼 긴 광목 천이었다. 남자는 한쪽을 유상책에게 넘겼다. 두 사람은 각기 심술이와 한봉이 누나에게 재갈을 먹였다. 그리고 묶인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을 데리고 곳간으로 갔다. 모두들 길을 내 주었다. 곳간은 텅 비어 있었다. 소작료를 받았을 때에는 볏섬과 쌀가마니들이 가득 찼던 곳이었다. 너무 길어서 대들보를 받치는 동바리기둥이 멀찌감치 따로따로 서 있었다. 둘은 등을 돌린 채로 서로 떨어진 동바리기둥에 묶였다. 심술이는 두 놈이 달라붙어서 묶었다. 다시 동아줄을 잘라서 두 발목까지 묶었다. 마찬가지로 유상책은 한봉이 누나를 묶었다. 머릿수건을 벗은 사람이 서서 지켜보았다. 모두 마치고 유상책은 곳간의 통쇠를 채웠다.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 저물어 가고 있었다. 신바람이 난 두 놈을 앞세워서 한다리 사람들은 심참판 댁을 빠져 나왔다. 물론 하님이도 끼어 있었다.

  곳간은 창문이 없었다. 잠긴 문 틈새로 가느다란 빛이 스며들었다. 그것도 이내 꼬리를 감췄다. 밤이 된 것이다. 너무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마음까지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자, 어린 시절 고향이 떠올랐다. 가난했지만 마음 대로 뛰어 놀던 고향이었다. 그런 내가 친척 손에 이끌려 이곳 심참판 집에 양아들로 들어온 것이다. 쌀밥에 간간이 고깃국도 먹었다. 예의범절을 배우고 따르느라 얼마나 불편하게 지냈는가. 벗도 없었고, 뛰어 놀지도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산 것이다. 그런 내가 내일 어이없게도 궁형을 당한다. 장가 밑천이라고 하는 남근을 잘라내는 것이다. 그것은 패륜의 대가라고 한다. 도대체 패륜이 무엇인가? 저희들끼리 마음 내키는 대로 법을 만들고 그 올가미에 걸려들면 너구리 타작하듯 입맛대로 두들겨 패는 것이 패륜인가? 아버지 심참판도 그렇다. 자기가 내시가 되어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었으면 그만이지, 왜 성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고통을 주었는가. 그것도 모자라서 후처로 어리고 어린 한봉이 누나를 논 몇 마지기에 사들여 저희들 통속에 집어 넣었는가. 나도 그 통속에 양자라고 하여 허울 좋게 갇힌 것이다. 그 닫힌 통속에서 생명이 있는 것들이 살아나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패륜이라고 하는가. 너희들 마음 대로 해라. 그 까짓 것, 없으면 없는 대로 중놈 짓 하고 산다고 치면 될게 아닌가. 심술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러나 한봉이 누나는 달랐다. 어린 나이에도 지게에 장군(분뇨통)을 지고 다녔다. 비 오는 날에도 도롱이를 쓰고 일했다. 쉬는 날이라고는 화창한 날 냇가에서 빨래할 때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들이 놀리고 물장난을 쳐도 그냥 웃어 주었던 한봉이 누나. 그 누나가 내일 뜨거운 불에 달군 인두 지짐을 당한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랫도리를 벗겨서 당한다. 내 새끼가 아니라, 누구의 새끼라도 그렇다. 아니, 짐승의 새끼도 보살펴 주는데, 애를 밴 한봉이 누나를……. 그것도 그곳을 지지는 것이다. 이게 그 잘난 법도란 말인가? 심술이의 울음소리가 문풍지에 스치는 바람처럼 재갈 틈새로 새어 나왔다. 그것은 심술이의 울음소리만이 아니었다. 한봉이 누나에게서도 똑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심술이는 울음을 그쳤다. 목숨만 살려준다면, 어디 종으로만 팔지 않고 내쫓기기만 한다면, 부디 그렇게만 된다면, 한봉이 누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리라. 한봉이 누나가 가고 싶다던 금강산 너머 동해 바닷가에 가서 살리라. 누구도 우리의 지난 일들을 모르는 멀고 먼 곳에 가서 살리라. 바다소금을 싣고 오는 배꾼들이 말하기를 바다는 넓고 넓어서 끝이 없다고 하였다. 얼마나 시원한 세상인가. 그 세상에서 둘이 살다가, 그 곳에서 죽으리라. 어느새 심술이는 서러움에서 벗어나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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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7/07 [15:51]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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