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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의 옛이야기 8]
용마산 이절(彝寺) 이야기
향토 사학자 김민수 선생의 이절에 얽힌 옛이야기
 
김민수 시민기자   기사입력  2006/02/16 [18:02]

일명 아차산 박사로 불리우는 광진구의 대표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용마산 이절에 얽힌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디지털광진」에 보내왔다.
이절은 원래 지금의  용마산 팔각정 서쪽에 있었다. 그 다음 중곡동 정신병원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자리를 옮겨 아차산 기슭에 영화사라는 이름의 사찰로 남아있다. 「디지털광진」에서는 지난 2003년부터 연재해왔던 아차산과 광진구에 관련된 전설, 이야기에 이어 이절 이야기를 올린다.
▲용마산 팔각정에서 바라본 이절터. 사진 가운데 잔디밭이 이절이 있었던 곳이다.     © 홍진기

  
          용마산 이절(彝寺) 이야기
                                       향토사학자 김민수
  아차산 중에서도 지금의 용마산은 병풍처럼 바위가 둘러져 있어서 그 위용에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경관이 수려하였습니다. 비바람이 몰려와서 안개가 걷힐 때에는 마치 신선들이 사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러한 곳은 예로부터 하늘의 신비로운 기운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절벽들이 이어진 병풍바위 아래에 용마산 팔각정이 서 있습니다. 용마산 팔각정은 얼마 전에 지었습니다. 바로 그 서쪽에 평평한 잔디밭이 있습니다. 더러는 무덤들도 남아 있습니다만, 이곳은 아주 먼 옛날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령님을 맞이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내력을 알고서 절이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이절(彝寺)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신()에게 올리는 깨끗한 물(明水)과 향기로운 술(울창주)을 담는 그릇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절은 우리의 민속을 이어받은 전통사찰이었습니다.
  이야기는 먼 고려시대로 올라갑니다. 한양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병풍처럼 깍아 세운 듯 보이는 용마산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장안 6동(화양·송정·모진·중곡·군자·능동)은 물론이고, 멀리 성안(후에 4대문 안) 사람들까지도 밤을 지새며 올라와서 새벽 불공을 드렸습니다. 초파일날에는 오르는 사람들의 초롱불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치 용마산은 반디불로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연이은 초롱불들이 닿은 이절은 촛불을 켜놓은 연등으로 가득히 차서 마치 달님이 용마산에 걸려있는 것처럼 눈이 부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절에는 두 분의 스님밖에 없었습니다. 큰스님 한 분과 어린 동자승 하나뿐이었습니다. 절의 살림은 용마산 기슭에 사는 보살(여자신도)들이 와서 보살펴 주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절의 살림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큰스님이 떠나시고, 얼마 있지 않아서 몸집이 크고 건장하신 스님이 오셨습니다. 얼굴에는 주름살도 없었고, 윤기가 넘쳐흘렀습니다. 넘치는 윤기는 밀어낸 머리까지 퍼져서 마치 달이 떠다니는 것처럼 번뜩거렸습니다. 또한 용을 새긴 지팡이(주장자)까지 짚고 계셨습니다. 가사에 큰 가사를 걸치시고 지팡이를 짚으신 스님의 위용은 용마산의 병풍 바위들을 밀어낼 만큼 당당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젊은 보살들도 많이들 와서 이절은 더욱 활기가 넘쳤습니다.
  이절이 활기가 넘칠 수록 바쁜 것은 어린 동자승이었습니다. 더러는 보살들이 맡아주었지만, 스님의 방을 정돈하는 것이나, 나무를 해 오는 일 그리고 해우소(화장실)의 것들을 퍼내서 버리는 일은 모두 동자승의 몫이었습니다. 보살들이 미처 준비해 오지 못한 것들이 있을 때에는 급히 마을로 내려가서 사오는 심부름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자승은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항상 방글방글 웃어서 보살들의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뒷바라지는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밤늦게 해우소를 들리셨습니다. 그리고 명수천(明水泉;약수터) 밑의 개울에서 멱을 감으시고 주무셨습니다. 그래서 동자승은 저녁 공양(식사)을 마치고서 바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점점 추워졌습니다. 그래서 데운 물을 담은 물동이를 스님의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창 밖으로 비치는 스님의 그림자를 보면, 스님은 뒷물을 하시기 전에 젖은 수건으로 온 몸을 닦으셨습니다. 발까지 씻고 나서 물동이를 내보냈습니다. 이 일까지 마치고서야 동자승은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이절터(위의 사진 가운데만 부분확대)     © 홍진기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스님은 새 내막이(속옷)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밖에 서 있던 동자승은 요사채의 별실로 가서 보살들이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새 내막이를 꺼내서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순간 동자승은 깜짝 놀랐습니다. 벌거벗은 스님을 처음 본 것입니다. 호롱불에 비친 스님은 버티고 앉아 있는 바위와 같았습니다. 그 사타구니 사이로 뻗친 거시기(男根)는 무릎에 닿을 만큼 길었습니다. 그냥 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리빛을 머금은 스님의 거시기는 우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새벌(중랑천일대)에서 뛰노는 말의 그것보다 더 우렁찼습니다.
  "얘야, 등을 문지르거라."
  스님이 젖은 수건을 뒤로 건넬 때까지 동자승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습니다.
  “예, 스님”
  동자승은 나쁜 마음이 들킨 것처럼 흠칫하였습니다.
  스님의 등은 연자방아의 웃돌처럼 넓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사타구니 쪽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동자승은 스님을 밀쳐내고 사타구니의 거시기를 보고 싶을 만큼이나 호기심이 일어났습니다. 동자승은 스님의 등을 밀어드리고 나서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스님은 마른 수건으로 몸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지가랑이를 묶는 대님 하나를 따로 들었습니다. 잠시 자기의 거시기를 바라보더니 왼쪽 허벅지에 그것을 붙이고서는 들고 있던 대님으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동자승은 종종 스님의 등을 닦아드렸습니다. 스님은 자신의 거시기를 오른쪽에도 묶었습니다. 거시기가 힘에 겨워 꿈틀거릴 때에는 오른쪽 허벅지에 묶는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용마산은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눈들이 비켜간 병풍바위는 늘어진 소나무들과 함께 멋진 장관을 이뤘습니다. 그 아래의 이절은 간혹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면, 그냥 눈 속에 묻힌 용마산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인적이 끊길수록 외로운 것은 동자승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스님의 큰 거시기를 보고 나서는 입이 근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옛적에 임금님의 큰 귀를 보고서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대나무 숲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귀, 귀' 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고 합니다. 동자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자승은 마을로 내려갈 때나 다시 올라올 때에 흥얼거렸습니다.
  "스님의 다리는 네 개
   하나는 지팡이
   두 다리는 땅을 딛고
   하나는 무얼까?"
  
   그리고 나서 껑충껑충 뛰면서
 
   "나는 알지, 나는 알지
    하나는 하나는
    종도 칠 수 있고
    북도 두드리지"
   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떤 때에는 제 흥에 겨워서 눈밭을 뒹굴기까지 하였습니다.
▲용마산 팔각정 서쪽의 이절터에는 아직도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서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홍진기

  어느덧 겨울이 가고 눈 녹은 물들이 계곡을 따라 조잘거리듯 흘러내리는 새 봄이 왔습니다. 그래도 동자승의 노래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되려 개울물 소리가 박자가 되었습니다. 더러는 동자승을 꾸짖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히쭉 웃고 내달음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동네 아낙네들이 스님의 거시기가 얼마나 크냐고 물으면, 방긋 웃고는 서너 발 뛰고서 돌아서서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였습니다. 그러면 동네 아낙네들은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절에 젊은 보살들도 스님과 마주치면 합장(인사)을 하고 나서 지나치자마자 웃음을 참느라고 킥킥거렸습니다. 스님은 그러한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그저 그렇게 지냈습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무더운 여름이 와도 개울에서 멱을 감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녁 늦게 큰일(대변)을 보시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으시고 주무셨습니다. 작은일(소변)은 요강에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우수개소리를 잘 하는 나이 많은 보살들은 스님께서 작은일을 보실 때에는 앉은 채로 거시기만 꺼내서 요강에 걸치면 된다는 등, 그렇게 한 채로 불경을 읽으신다는 등, 스님의 거시기는 상상할 수 있는 대로 웃음보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절에는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친정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불공을 드리려고 멀리서부터 찾아왔습니다. 모두가 자식을 못 낳거나, 아들을 얻지 못한 집안들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것이 여자의 큰 죄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소박을 맞거나 쫓겨나는 아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여인들은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빌고 또 빌었습니다. 남자의 거시기 모양을 한 돌로 된 장승이나, 홀로 서 있는 돌부처는 빌기가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코를 갈아서 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코는 거시기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아 계신 스님의 거시기가 대단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한 여인들은 생불(살아있는 부처)을 만난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절의 초하루나 보름날은 법당에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스님의 옆자리는 아예 밤을 지새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나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들이 간간이 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제는 법당만이 아니라 마당(도량)에까지 멍석을 깔아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야단법석이었습니다.
  한 두어 해가 지나서는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습니다. 아들, 딸을 낳는데도 구별이 있었습니다. 스님의 거시기가 왼쪽 허벅지에 묶인 날에 불공을 많이 드린 여인들은 딸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오른쪽 허벅지에 묶인 날에 불공을 드려야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짖궂은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들은 스님이 밖으로 나오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주 걸어오면서 스님에게 합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실은 스님의 사타구니를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것이었습니다. 헐렁한 스님의 바지에 그러한 표시가 쉽게 나타날 리는 없었습니다. 간혹 산바람이 불어와서 스님의 굵어진 허벅지를 볼 수 있을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른쪽 허벅지면 '오른쪽, 오른쪽'하고 딸이나 며느리에게 내달음 쳤습니다. 왼쪽이면 '휴∼'하고 한숨만 쉬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태어난 여자아이에게는 애꿎은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왠둥이라고 불렀습니다. 왼쪽을 서울 방언에서 왠쪽이라고 하는 데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태어난 아들은 당연히 오른둥이였습니다. 그냥 줄여서 온둥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불공도 마음대로 드릴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잘못하면 집안에 왠둥이만 줄을 설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럴수록 인기가 오르는 것은 동자승이었습니다. 가끔 스님의 등을 훔치는 것은 동자승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살들은 뒷날 동자승을 보면, 어느 쪽이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동자승은 방긋 웃고 말뿐입니다. 애가 타는 보살들은 구운 고구마나 잘 말린 곶감을 동자승에게 다투어가며 주었습니다. 그래도 동자승은 벙어리처럼 방긋 웃고 받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재일(절의 명절)때에는 달랐습니다.
  "아기스님, 아기스님
   해가 떴나요, 졌나요"
   보살들이 합창을 하듯이 물으면, 동자승은 돌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축대 위에 비켜서서 아래에 모인 보살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리에서 팔짝 뛰어서 뒤돌아 섭니다. 왼손을 들고 펴서 보자기를 내보이면, 스님의 거시기가 왼쪽 허벅지에 묶인 것입니다. 그러면 보살들의 입에서 '아이고'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오른손을 들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 오른쪽 허벅지에 묶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고 짧은 함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어떨 때에는 돌아서지도 않고, 물끄러미 보살들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 묶었는지 자기도 모른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면 '어쩐담'하고 푸념하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자승과 보살들의 암호놀이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늦가을이 접어들자, 동자승은 보살들의 성화에 대꾸는 고사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스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철이 나서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용마산에서 내려온 이절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중곡2동 150번지 일대   © 홍진기

  다시 새봄이 왔습니다. 아낙네들 사이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거시기를 꺼내었을 때, 거기를 향하여 불공을 드리면 효험이 바로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이 거시기를 꺼낼 때는 밤늦게 해우소를 들리실 때 한번뿐입니다. 이제는 밤에도 야단이 났습니다. 초하루나 보름 그리고 재일 때의 해우소는 횃불들이 모여들어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횃불을 들고, 딸이나 며느리들은 스님이 들르신 해우소를 향하여 기도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만큼은 부정을 탄다고 하여 아예 남정네들은 해우소 주위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스님이 우렁찬 방귀라도 뀌실 때에는 대박이 터지는 날입니다. 모두들 잰걸음으로 이절을 내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곤히 자는 아들, 사위를 깨워서 며느리 또는 딸과 함께 잠자리를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만을 따로 벼락둥이라고 불렀습니다.
  절에서는 큰 명절(재일)이 네 번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신 초파일(음력 4월 8일),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신 출가재일(음력 2월 8일), 도를 깨달으신 성도재일(음력 12월 8일), 그리고 돌아가신 열반재일(음력 2월 15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월 초파일은 제일 큰 명절입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절을 찾는 날입니다. 이절은 새벽부터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해가 떠오를수록 사람들의 무리는 철쭉꽃과 소나무 숲 사이로 굽이쳐 이절까지 이어졌습니다. 서녘하늘의 해무리가 붉은 노을 속으로 잠겨갔습니다. 그러자, 이절의 마당을 꽉 채운 연등들이 연꽃처럼 밝아왔습니다. 마치 이절의 대웅전은 연꽃 위에 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용마산에 높이 있는 이절은 하늘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점점 밤이 깊어갔습니다. 이번에는 해우소의 주위에서 횃불들이 피어올랐습니다. 하늘을 향한 소리 없는 함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꿈틀거리는 용이 하늘로 오르려고 황금갈기를 휘날리는 것처럼 횃불들은 살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세상은 상당히 어지러웠습니다. 고려에서는 지금의 서울을 남쪽의 서울이라고 하여 남경(南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여러 번 작정하였지만, 끝내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새로운 기운을 일으키려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버리고 이곳 서울을 한양(漢陽)이라고 하여 수도로 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은 엄청난 공사가 일어났습니다.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았습니다. 도로를 만들고 관청과 상가들이 들어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한 몫 잡으려는 치기배들도 모여들었습니다. 옛 나라인 고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새 나라인 조선을 세우려는 사람들과의 보이지 않는 암투가 일어나는 곳도 서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세우려는 사람들은 고려가 믿었던 불교를 누르려고 하였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이 근본이 되는 유교를 받들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초파일을 맞은 것입니다. 용마산 이절의 횃불들이 활활 타오른 것도 이때였습니다.
  새로 지은 궁궐에서 첫봄을 맞이한 태조 이성계는 밤늦게 후원을 거닐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용마산의 횃불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차산(용마산)이 아닌가. 봉화불이냐, 산불이 난 것이냐"
   그렇지 않아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이성계에게 용마산의 횃불은 변란의 징조처럼 보였습니다.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오늘이 초파일이어서 아차산(용마산) 이절에 사람들이 모인 것  입니다." 다급해진 내시는 얼른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 초파일 밤이면 연등을 달면 말 것이지, 왠 횃불이냐."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은 이성계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차산(용마산) 이절에 신승(신기한 스님)이 있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신승을 보려고 횃불을 켜든다고 합니다."
   내시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이성계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신승이라니, 나라가 망할 때 요승(요망스런 스님)들이 들끓었다. 신라 때의 궁예가 그랬고, 고려의 신돈이 그랬다"
   내시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뒷날 이성계는 신하들로부터 용마산의 이절에 대한 자초지종을 죄다 들었습니다. 이절을 없애려고 하였지만,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 두었습니다. 대신 이절을 산 맡으로 내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불빛이 궁궐 쪽으로 비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절은 긴고랑 개울가로 내려왔습니다. 지금의 중곡동 국립서울병원의 남쪽으로 옮겨 다시 지은 것입니다. 이 동네를 지금도 절안(절의 안쪽)·절뒤(절의 뒤쪽)·절골(절이 있는 마을)이라고 부를 만큼 흥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절의 명칭은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랑천 일대가 말을 키우는 살곶이목장이었습니다. 이를 바라보던 정자를 화양정(華陽亭)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말이 뛰노는 넓은 벌판을 화양벌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옮겨온 이절의 이름도 화양사()로 바꿔 불렀습니다. 그 후로부터 용마산 이절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거시기가 큰 스님 그리고 동자승의 이야기도 이절과 함께 묻혀버린 것입니다. 이절 터에서 주울 수 있는 기와조각들만이 이 높은 용마산에 절이 있었구나, 하는 감회가 일 뿐입니다.
▲아차산 영화사의 미륵불상     ©홍진기

  그러나 용마산 기슭에서 알게 모르게 번성하였던 화양사(전에 이절)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기울어져갈 때입니다. 고종황제의 세자(후에 순종)빈(아내)이 돌아가셨습니다. 후에 황후로 높여서 순명황후 민씨라고 합니다. 이분의 무덤을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팔각정 부근에 만들었습니다. 흔히 유강원(裕康園)이라고 합니다. 이때 유강원의 오른쪽에 있는 화양사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따지기 복잡한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화양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차산 기슭으로 옮겨왔습니다. 옮겨온 곳이 지금의 영화사(永華寺)입니다. 영화사의 옛 이름이 화양사인 것입니다. 절로 옮길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중곡동의 화양사에는 높이만 4m가 넘는 돌로 만들어진 미륵부처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륵부처님을 영화사까지 옮기는데 40여 일이 넘게 걸렸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동안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능력을 보이신 미륵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시주(돈을 냄)하여 따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집 안으로 미륵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이것이 영화사의 미륵전입니다. 지금은 많은 어머니들이 아들, 딸이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들, 딸을 구별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옛날 용마산 이절에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높이 들었던 횃불들이 지금은 학부모들이 자녀의 입학을 비는 수많은 촛불들로 바뀌었습니다. 언뜻 저녁노을을 머금은 미륵부처님의 우람한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용마산 이절 스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외람 된 마음일까요?.
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스님의 이야기는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이절의 등불이 한양 궁궐에까지 비친다고 하여 산 아래로 옮겨 짓게 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영화사 대웅전 전경     © 홍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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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2/16 [18:02]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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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현 2006/08/10 [11:13] 수정 | 삭제
  • 김민수 선생님 재미있는이야기 입니다
    그냥 뭍혀버릴수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찿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최복수 2006/02/17 [20:52] 수정 | 삭제
  • 정말 멋들어진 이야기 입니다.
    전설을 정리하시고 곳곳을 찾아다니시면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시는
    모습 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 광진구의 자랑이지요.
    앞으로도 많은 기대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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