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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장군 전사지는 아차산성
온달은 아차산성 전투에서 죽은 고구려의 고승 장군
 
향토사학자 김민수
 

▲사적 234호 아차산성 전경     ©디지털광진

온달장군은『삼국사기』온달전에만 기록되어 있다. 온달은 미천한 출신에서 평강공주를 만나 일약 대장군이 되었다. 온달의 입신양명이나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이러한 극적 상황이 감동으로 승화되어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온달전은 역사적 고증을 요구받는 과정에서 그의 전사지에 대한 견해가 다르게 주장되고 있다. 각기 다른 근거는 『삼국사기』의 아단(차)성과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을(乙)아단성에서 비롯한다. 『삼국사기』의 아단성 또는 아차성은 단(旦)과 차(且)의 구별을 확연히 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혼란이다. 이를 뚜렷하게 새겨진 「광개토대왕능비」의 아단성(阿旦城)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할 경우에 『여지도서』의 충청북도 단양군 지경의 을아단성은 '을(乙)'이 '웃(上)'의 빌림글자로 비정되어 웃아단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강하류의 아랫 아단성과 남한강상류의 웃아단성이 서로 대응하여 있게 된다. 이에 아랫 아단성은 그대로 아단성이라고 하고, 웃아단성에게만 '을(乙)'의 머릿글자를 붙여 을(乙)아단성이라고 다르게 표현하여 서로 구별한 것이 된다.

  온달의 전사지는 한강하류인 서울에 사적 아차산성이 있으므로 아무런 고증도 없이 이곳으로 비정되어 왔다. 이는 『삼국사기』의 아단(차)성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결과이다. 필자는 이러한 속단을 논리적으로 고증하여 사적 아차산성 지경에서 온달이 전사하였음을 자세히 밝혔다. 간략히 후술하겠다.

  문제는 온달의 전사지를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 지경으로 보는 견해이다. 문헌적 근거는 『여지도서』에서 이 곳의 온달산성을 고구려왕의 부마인 온달이 쌓았다고 전하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왜 『삼국사기』온달전에서 그가 전사한 곳을 을아단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아단성이라고만 하였을까. 그리고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아단성을 되찾으려고 출정하였으므로 온달산성이 이에 해당한다면 고구려 신라의 유물들이 시차를 두고 출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온달산성을 발굴한 결과 신라에 의하여 쌓아졌으며, 신라 계통의 유물만이 출토되었다. 온달산성은 고고학적으로 아단성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강하류와 남한강상류 사이에는 수많은 성들이 있었을 것인데, 유독 서울의 아단성과 단양의 온달산성 두 개만을 지목하여 아랫 아단성과 웃 아단성으로 비정한 것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온달산성 지경을 온달의 전사지로 추정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원초적인 의문을 풀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역사적 정황에서 온달의 전사지를 찾아 낼 방법은 없을까.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지만, 그의 시대에 전사한 것이 아니다. 장인인 평원왕이 죽고 나서 그의 맏아들인 영양왕( 陽王)이 즉위한 다음에 아단성까지 출정하였다가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온달은 자기의 처남인 영양왕에게 한북(漢北)의 땅을 신라에게서 되찾게 해달라고 주청하였다. 허락을 받고 출정하면서는 계립현( 立峴)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한북의 땅에 관계된 곳은 서울의 사적 아차산성 지경이다, 계립현·죽령 서쪽의 땅에 관계된 곳은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 지경으로 비정할 수 있다. 두 곳 중에서 어느 한 곳이 온달이 전사한 역사적 정황과 맞는 것일까.

고구려의 영양왕 때 신라의 왕은 진평왕이다. 영양왕은 수 (隋)제국의 세 차례에 걸친 침입을 막아내었다. 그래서 대제국인 수나라도 멸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고구려가 영양왕 시대에 신라를 공격한 것은 딱 한 차례 있었다. A.D.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이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지금의 사적 아차산성으로 밝혀졌다. 시굴조사(2000년)에서 사적 아차산성 내의 유물들이 신라의 것들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기와에 새겨진 北漢山의 글씨가 여럿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임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강하류까지 北進한 신라의 거점은 말할 것도 없이 사적 아차산성인 그들의 북한산성이다. 이 곳을 고구려에게 빼앗긴다면 신라는 북진의 진로가 막히는 것이다. 이에 신라의 진평왕은  1만군을 이끌고 와서 북한산성(현재의 아차산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을 격퇴시켰다. , 고구려의 역사를 쓴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이때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의 패한 장수는 고승(高勝)이었다. 기록에 비추어 보건데 고승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온달전에서 평강공주를 시집보내려는 가문은 상부 高씨의 집안이었다. 평강공주가 아니 가겠다고 버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왕가의 상식에 어긋난다. 더군다나 평강공주가 미천한 온달을 찾아 나선 것은 더욱 그렇다. 고구려의 영양왕 시대의 온달은 신라와 싸우다가 아단성 지경에서 전사하였다. 영양왕 때의 신라와의 싸움은 딱 한번 신라의 북한산성에서 있었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지금의 서울에 있는 사적 아차산성으로 밝혀졌다. 이때 패한 고구려의 장수는 고승이었다. 평강공주의 혼처가 고씨 집안이었다. 바로 고승장군이 온달인 것이다.

  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삼국사기』온달전은 위작하였을까.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에 쓴 것이 아니다. 고려시대인 A.D.1145년 정치가인 김부식 등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이 즈음 대초원에서는 몽고족이 발흥하고 있었다. 몽고족에 쫓긴 거란과 여진이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삼면의 바다는 언제 어디서나 왜구들이 출몰하여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고려가 처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훈교적 가치관의 제시가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本紀는 紀傳體로써 역사적 기술에 충실하여야 한다. 따라서 국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여백은 열전 편뿐이었다.

이에 따라 고승장군을 온달로 대치시킨다면, 미천한 사람들도 나라를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 이들에게 부마의 공명까지 곁들인다면, 이는 충성에 대한 보은의 극치이다. 『삼국사기』온달전의 편찬자는 계급사회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온달전을 저술한 것은 닥쳐올 고려의 국난을 민중의 힘을 빌어서 타개하려는 의도가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기사입력: 2004/05/29 [15:28]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밝은미소 10/09/26 [14:28] 수정 삭제
  선생님, 어제 서초여성센타에서 경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의 해설을 잘 듣고 오늘 싸이트를 방문해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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