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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말의 도깨비불 이야기
자양2동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이야기
 
향토사학자 김민수   기사입력  2004/02/23 [18:07]

  한강변의 자양동에는 점말이라는 경치가 좋은 동산이 있었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한강으로 날아드는 철새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큰 느티나무가 마주보고 서 있는 바위벽에는 성황당이 차려져 있었다. 그래서 점말의 옹기장이는 물론이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치성(지금 제사)을 드리러 다녔다. 이곳에서 대대로 성황당을 살펴보면서 내림굿으로 이어온 무속인(옛날 무당)이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그 어머니, 할머니도 이곳에서 내림굿을 받은 무속인 집안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흔히들 처녀무당이라고 불렀지만, 누구도 처녀무당이 사는 곳은 알지 못했다.

▲성황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자양동 57번 종점     ©디지털광진

보름달만 뜨면 점말에 찾아오는 처녀무당.
점말에 들어온 일본사람들은 동산의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하고.
그러나 처녀무당은 둥근 달이 뜨는 보름날에는 어김없이 점말로 왔다. 그리고는 우물가에서 몸을 깨끗이 하고 성황당에 올라갔다. 밤 새 기도를 드리고는 동녘 하늘에 해무리가 퍼질 때쯤 하여 내려오곤 하였다. 하얀 치마가 강바람에 나부낄 때에는 마치 선녀가 하늘 나라에서 내려오는 것 같이 하늘거렸다. 이러한 처녀무당에게 점말 사람들은 말을 건네지 않았다. 신령스러운 기운을 머금은 처녀무당에게 동티(잘못되는 일)나는 일이 생겨날까 염려하는 마음에서였다.

  일본 사람들이 점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말 주위도 달라졌다. 한강변으로 둑을 쌓은 것이 그랬다. 그래서 넓혀진 들에는 논과 밭이 일궈졌다. 일궈진 논과 밭을 가꾸기 위해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점말 아래로 제법 저녁 연기가 오를 만큼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순사들이 점말 동산으로 올라왔다. 뒤따르는 인부들은 큰톱과 괭이 같은 연장들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말 동산의 큰 나무들을 마구 베기 시작하였다. 넘어지는 나무들의 쿵쿵거리는 소리는 온 땅을 울렸다. 놀란 점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들 불안해서 웅성거렸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온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내두르면서 고함을 쳤다.

한 노인의 항의로 성황당 주변의 나무는 벌목을 면한다.
 '이놈들아, 이 무슨 짓이야, 조상의 혼백을 베는 놈들 보아라'
 앞으로 엎어질 것 같은 노인을 사람들이 부축하였다. 숨을 가다듬은 노인은 다시 소리쳤다.
 '누구냐, 나무를 베라고 한 놈이, 너희 나라는 조상도 안 모시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나무를    베, 이놈들 나를 베라'

노인의 호통은 가쁜 숨을 토해내면서 띄엄띄엄 이어졌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듯 날카로웠다. 지금껏 쳐다보던 일본 순사 한 사람이 재빨리 내려왔다. 그리고는 노인 앞에 서서 두발을 모으고 빠른 동작으로 경례를 올렸다.

 '저는 서대문 형무소의 간수장입니다. 상부의 지시로 모범수를 데리고 와서 나무를 베고 있   습니다. 노인께서는 무엇이 못 마땅 하신지요?'
 일본 순사는 서툰 우리말이지만 또박또박 정중히 말했다.
 '이놈아, 여기는 우리 조상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는 곳이다. 나무를 벨 때가 없어서 이곳의   나무를 베느냐'
 일본 순사는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오니까 으스스 해서 무서웠습니다. 우리 일본 사람들도 조선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신사를 두고 마을신을 모십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만 두고 돌아가면 되지, 어떻게라니…,'

  말을 마친 노인은 힘에 겨워 털썩 풀섶에 앉아버렸다. 그제서야 점말 사람들이 나서서 일본 순사에게 성황당의 내력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고 나면, 산사태가 나서 우리들도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까지 하였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던 일본 순사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상부의 지시로 나무를 잘라 가야합니다. 그러나 성황당   주변의 나무는 그대로 두겠습니다. 비탈에 있는 나무들도 자르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산사   태는 없을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무를 자른 곳에는 다시 뽕나무를 심는다고   들었습니다.'

  더 이상은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안 점말 사람들은 집 주변의 나무들도 자르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일본 순사는 점말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성황당 주변을 넓게 빙 둘러서 새끼줄을 쳤다. 그리고 집 주변에도 돌들을 놓아서 더 이상 나무를 자르지 않게 표시하여 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무를 자르는 벌목작업은 며칠 계속되었고, 나무를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몇 번 다니고 나서 점말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시 들어온 일본인 '고바야시'는 성황당을 없애고 싶어하는데.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이었다. 진흙길을 붕붕거리며 힘겹게 트럭들이 올라왔다. 트럭에는 뽕나무들이 가득 실려있었다. 실린 뽕나무를 의지해서 누워 있는 사람들은 지난번과 같이 머리를 깍은 죄수들이었다. 그런에 앞좌석에서 내린 사람들은 지난 번의 순사들이 아니었다. 일본사람들의 옷인 기모노 차림의 건장한 장년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니뽄도라고 하는 일본의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소위 사무라이라고 하는 무사들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일본 정부나 일본 사람들이 하기 힘든 일들을 거들어 주었고,  그 대가로써 큼직한 돈벌이를 챙기곤 하였다. 어떠한 일의 대가인지는 모르지만, 점말의 뽕나무밭을 일구고 누에치는 일을 얻어낸 것은 고바야시(실제는 '고마기'라는 일본인 무사라고 전해 내려오지만 전설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실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어 고바야시라는 가명을 사용합니다.-편집자 주)라고 하는 무사였다. 고바야시는 일본 사람 같지 않게 키가 컸다. 치켜세운 눈매는 금방 달려들 것처럼 사나왔다. 같은 일본 사람들까지도 꺼리는 것 같았다. 고바야시는 오랫동안 죄수들을 부렸다. 뽕나무밭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가까운 벽돌공장에서 실어온 벽돌로 집과 잠업장을 다 지을 동안 죄수들을 부렸다.

  어느덧 뽕나무밭은 고랑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무들이 자랐다. 잠업장에도 점말 사람들이 가서 일을 했다. 처음에는 꺼렸지만 품삯을 넉넉히 쳐주는 재미로 인기가 있는 일터가 되었다. 그래서 뽕나무들이 크는 것만큼 점말의 잠업장은 바빴다. 그럴 수록 골치 아픈 것은 잠업장의 목을 가로막고 있는 성황당이었다. 성황당의 오른쪽 모퉁이를 짤라낸다면 잠업장까지 훤히 길을 틔울 수 가 있었다. 바로 잠업장까지 트럭이 올라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바야시는 점말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고바야시의 말을 거스르는 점말 사람들은 없었다. 있다고 하여도 드러내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성황당만은 예외였다. 누가 선뜻 동조하여 나서주는 점말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처녀무당은 이러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거르는 날이 없이 성황당에서 치성을 드렸다. 답답한 것은 고바야시였다. 성황당의 터를 너무 넓게 보전하여 주었기 때문에 잠업장의 내리목을 거의 막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랴, 성황당이 없었더라면, 그 서쪽으로 연결된 구릉까지 얼마나 많은 뽕나무를 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일손이 모자라서 점말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들이 신주처럼 믿는 성황당에 흠집을 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일본의 무사로써 일개 처녀무당을 빌미도 없이 내쫓았다는 것은 고바야시의 체면에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고민하던 고바야시는 처녀무당과 협상을 하여 결판을 내려고 별렀다.

고바야시는 성황당에서 처녀무당을 목 졸라 살해하고 만다.
 고바야시는 둥근 달이 떠오르는 보름날 밤을 택하여 성황당의 길목을 지켜섰다. 점말로 들어선 처녀무당은 여느 때처럼 우물가에서 몸을 씻었다. 옷맵시를 가다듬은 처녀무당은 층계 돌을 밟으면서 사뿐사뿐 걸어 올라왔다. 고바야시는 소리쳤다.

 '이봐라 처녀, 나는 잠업장의 주인 고바야시다. 할말이 있다, 서거라'

  처녀무당은 그대로 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하얀 치마를 펄럭이면서 계단을 모르는 처녀무당의 뒷모습은 선녀인지, 귀신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고바야시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모욕감과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이 고바야시의 마음에서 뒤엉켜 갔다. 고바야시는 끌려가듯이 처녀무당을 따라 갔다. 성황당에 다다른 처녀무당은 안고 온 보따리에서 몇 가지의 제수품(음식들)들을 돌상(石床)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함을 열었다.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켰다. 마지막으로 말았던 초석을 꺼내어서 깔았다. 거기에 사뿐히 끓어 앉은 처녀무당은 한 동안을 그대로 있었다. 촛불에 비친 처녀무당의 옅은 그림자를 다시 달빛이 머금고 덧씌워서 길게 늘어졌다. 처녀무당의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것을 안 고바야시는 흠짓 놀랐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이년아, 내가 고바야시다. 나를 몰라보느냐?'

  고바야시의 고함은 맹수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고바야시는 그렇게 분명 떨고 있었다. 그제서야 처녀무당은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선 처녀무당은 소리쳤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느냐, 썩 나가지 못할 테냐'

  여리고 여린 처녀무당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성황당의 신령이 처녀무당의 몸을 빌어서 호통치듯이 쇠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고바야시는 흠짓 물러섰다. 그리고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나섰다.

 '이년이…'

  고바야시의 입에서 신음 같은 절규가 새어 나왔다. 고바야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발한발 처녀무당에게로 다가섰다. 그것은 자그마한 자석에게로 큰 쇠붙이가 끌려가는 것처럼 무겁고 무서운 순간이었다.

  고바야시는 자기의 손아귀에 처녀무당의 목을 틀어 비튼 채로 한 동안을 그대로 서 있었다. 눈을 뜬 채로 노려보는 처녀무당을, 그 또한 노려보면서 그렇게 서 있었다. 검은 구름이 갑자기 몰려와서 달빛을 가렸다. 성황당에 으슥한 찬바람이 스치는 순간에야, 고바야시의 손은 풀렸다. 한 마리의 고운 학이 포수의 총에 맞아떨어지듯이 처녀무당은 그대로 초석 위에 내려앉았다.

  고바야시가 자리를 뜬 것은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였다. 성황당의 어귀를 빠져나가는 비바람은 울부짖는 것 같았다. 비바람이 점점 거칠어져 갔다. 성황당의 큰 느티나무는 못 견뎌서 서로 웅웅거렸다. 그때, 번쩍거리는 섬광이 검은 하늘을 갈랐다. 순간, 땅을 때리는 매서운 천둥소리가 울렸다. 성황당의 큰 느티나무는 포격을 맞은 것처럼 내려앉았다. 마치 처녀무당의 주검을 지키기 위하여 두 팔로 포개 안은 것처럼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그렇게 내려앉았다.

처녀무당이 죽은 후 성황당 주변엔 도깨비불이 날라 다니고
▲자양2동에 있는 낙천정. 일제시대에 지금의 낙천정과 빗물펌프장 사이에 대화숙(교도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디지털광진
 

처녀무당의 시신을 꺼낸 것은 다음 날 한나절이 지나서였다. 벼락 맞은 두 그루의 큰 느티나무들을 모두 치우고서야 간신히 처녀무당을 꺼낼 수가 있었다. 꺼낸 처녀무당의 시신을 조금 넓은 돌림목의 돌층계로 옮겨 놓았다. 이때 포승줄에 묶인 고바야시가 두 사람의 일본 순사에게 끌려서 내려왔다. 그들은 처녀무당이 놓여 있는 곳에서 잠시 멈췄다. 고바야시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매서운 눈매는 아니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한참을 눈을 감았다. 포승줄의 끈을 흔드는 일본 순사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마지못해 발을 떼는 고바야시의 뒷모습은 처량하게까지 보였다.

  그로부터 잠업장은 문을 닫았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잠업장 주위는 가지철조망이 둘러졌다. 성황당을 비켜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오르막길도 새로 만들었다. 트럭들이 잠업장을 바삐 드나들었다. 잠업장은 이내 교도소로 변해 갔다. 서대문 형무소에 딸린 '대화숙(大和塾   )'이라고 한다. 모범수들만을 모아서 농사를 짓는 농장이 된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고바야시는 점말의 잠업장을 그들 나라인 일본에게 도로 받쳤다고 한다. 그 대신에 처녀무당을 죽인 죄는 없는 것으로 하여 덮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고바야시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화숙의 교도관들 사이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돌았다. 보초를 서는 밤에 망루에서 성황당을 바라보면, 자그마한 불덩이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모여든 불덩이들은 한 방향으로 돌다가는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 불덩이는 제 힘에 겨워 성황당 주위를 휙휙 돌다가 내달려 가서 우물 속으로 빨려든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우물에서 나와 성황당에서 흩어진다고 하였다. 이렇게 밤 새 노닐던 도깨비불은 새벽녘에야 사라진다고 한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서 죄수들까지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대화숙의 일본인 교도관들은 점말 사람들에게 처녀무당의 혼을 위로하는 진혼굿을 부탁하였다. 그래도 흐린 날이나 부슬비가 내리는 밤이면, 도끼비불은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도깨비불이 처녀무당의 혼백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고바야시 때문에 부정을 타서 벼락을 맞은 성황당 할머니가 머리를 식히려고 우물 속으로 드나드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해방후 점말 사람들이 부군당을 모신 뒤부터 도깨비불은 사라졌다.
  해방이 되었다. 일본 사람들에게 부림을 당하였던 점말 사람들은 자유스럽게 농사를 짓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들은 겨울철에는 점말 동산에 움막을 짓고 서로 모여서 지냈다. 모여서 농한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였다. 주로 볏짚을 이용하여 멍석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흥이 나면 민요가락도 읊조리면서 그렇게 겨울을 났다. 그들에게 빠지지 않는 이야기 거리는 성황당의 도깨비불이었다. 모두가 도깨비불을 보았다고 이야기하였다. 어떤 사람은 도깨비불이 자기를 쫓아와서 혼났었던 이야기도 하였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깨비불이 담력을 시험하는 내기걸이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기에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도깨비불이 젊은 남자만 쫓아온다는 이야기가 있고 난 다음부터이다. 억울하게 죽은 처녀무당이 젊은 남자를 골라서 저승으로 데려가려고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점말 사람들은 성황당 옆에 부군당(男神)도 같이 모시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고서 치성을 드린 다음부터는 도깨비불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점말에 전기불이 들어오고 나서는 아예 도깨비불 이야기는 잊어버렸다.

  이제 광진구에서 점말을 찾을 수는 없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졌던 대화숙(교도소)은 현재의 자양빗물펌프장과 낙천정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성황당은 57번 버스 종점 부근인 것으로 자양동의 토박이들은 기억하고 있다.

(자료제공- 자양동 토박이 한기환. 글·구성- 향토사학자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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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2/23 [18:07]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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