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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廣津區) 지명에 대하여
향토사학자 김민수씨 “廣津區가 아니라 楊津區가 맞다.”
 
향토사학자 김민수   기사입력  2023/07/27 [07:40]

광진구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인 김민수씨가 광진으로 되어있는 현재의 구 이름이 역사적으로 볼 때 올바르지 못하다며 광진구(廣津區) 지명에 대하여라는 글을 디지털 광진에 보내왔다.

 

현재 우리가 광진(廣津·광나루)으로 알고 있는 곳은 원래 한강 남쪽 나루의 이름이며, 현 광진의 옛 지명은 양진(楊津)으로 광진(廣津)을 근거로 한 광진구의 구 이름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디지털 광진에서는 이 내용을 원문 그대로 가감없이 기재함을 밝힙니다.(이 글은 지난 2002년 같은 제목으로 디지털광진에 게재된 것으로 내용을 수정보완하여 다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광진구(廣津區) 지명에 대하여

 

                                                                      김민수 (향토사학자) 

 

우리가 살고 있는 한강하류의 위쪽에서는(전체 한강을 놓고 볼 때 양수리에서부터 한강 하류로 분류되고 있으며 현재 광진구 구간은 하류 중에서 위쪽으로 분류한다.} 예부터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양주군(楊洲郡), 그 남쪽은 광주군(廣州郡)이었다.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한때(1914) 지금의 광진구 지역이 고양군(高陽郡)에 편입된 적이 있었으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대략 고려·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지명개념에 의하여 한강 남쪽은 광주군, 그 북쪽은 양주군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지명개념은 이어지고 있다. 한강하류의 상류 북쪽에서 서울에 편입되었거나 시로 승격된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양주군이다. 양주군이 너무 넓으므로 둘로 나눠 위쪽을 그대로 양주군이라고 하고, 아래쪽은 남양주라고 한다. 그 남쪽의 광주군도 서울 강동구에 밀려나서 남아 있는 부분만을 광주시라고 하여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도를 세밀하게 만든 고산자 김정호선생은 대동지지(大東地志)라는 지리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양진성(楊津城)은 광진(廣津)江北()에 있는 아차산이 한강에서 끊어지는 절벽에 있다. 광주(廣州)의 풍납토성(坪古城)과 한강을 경계로 하여 마주하고 있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양주 지역이므로 그 나루를 지키는 양진성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형원(柳馨遠)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라는 지리책에서 양주의 경계에 다달아 양진(楊津)이라고 한다. 그 남쪽의 물가는 광진(廣津)이라고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광진도(廣津渡.광진나루가 있는 곳)는 광주의 서쪽 27리에 있다. 곧 한강의 나루이다. 그 북쪽은 곧 양주 지경이니 양주 사람들이 양진(楊津)이라고 일컫는다.’라고 하여 한강 북쪽은 양주의 나루라고 하여 양진(楊津), 그 남쪽은 광주의 나루라고 하여 광진(廣津)임을 분명히 하였다.

 

▲ 대동여지도의 아차산 인근 지명표기. 한강 남쪽에 廣津(파란색 밑줄) 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 디지털광진



이러한 광진은 대동여지도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한강하류의 상류에서 한강 북쪽에는 아차산(峨嵯山)이 있고, 한강의 남쪽에는 광진(廣津)이 글자로 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광진구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지명이다. 양주의 나루인 양진(楊津) 지역이었으므로 양진구(楊津區)가 맞는 것이다. 지금 천호동이 있는 강동구(江東區)가 광진의 나루가 있었으므로 광진구(廣津區)가 되어야 옳다.

 

이러한 역사적 전승을 헤아리지 못하였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광진(廣津)너븐(넓은)나루라고 하여 옹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 한자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한강을 건너는 나루는 물이 깊은 곳이어야 한다. 그래야 만이 끊이지 않고 많은 물자를 건넬 수가 있다. 물이 깊은 곳은 되려 강폭이 좁은 곳이다. 따라서 광진을 너븐(넓은)나루라고 해석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혹자는 양진(楊津)을 버드나무 나루라고도 해석하였다. 한강변의 버드나무는 살곶이목장(箭串場)의 한강 변에서 담장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살곶이목장의 동남쪽 담장은 세종실록에서 밝혔듯이 아차산 능선에 있었다. 그 남쪽에 양진(楊津)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해석도 맞지 않는다. 역사적 지명유래가 깃들어 있는 양주의 나루인 양진(楊津)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광진(廣津)의 지명이 우리 지역에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인 1934경성부구역 확장조사서(京城府區域 擴張調査書)에서 광진리(廣津里)와 장의동(壯儀洞)을 합쳐서 광장리(廣壯里)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한강하류에서 서로 넘나드는 양쪽의 나루를 따로 부르지 않고 하나의 나루로 불렀던 예가 있다. 그리하여 광진교(廣津橋)의 다리 이름도 하나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할 경우에 한강 북의 나루를 광진(廣津)이라고 한 것은 광진으로 가는 나루라는 뜻에서이다. 옛날 제주도의 명칭인 탐라도(耽羅島)로 가는 전라남도 강진(康津)을 탐진(眈津)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이렇듯 우리지역의 양진을 버리고 광진을 사용한 것은 우리고장의 주체의식을 상실한 표현이다. 그리하여 광진으로 가는 마을이라고 하여 광진리(廣津里)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광진리의 지명은 우리 고장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사람들에 의하여 붙여졌거나 찾아낸 지명이다. 이러한 근거로 광진구(廣津區)의 지명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의 역사성을 저버리고 일본제국 시대의 행정명칭을 이어 받는 꼴이 된다.

 

더욱 가관인 것은 1992년 발간된 성동구지(城東區志)에서 아차산 옆 용당산(龍堂山)에 광진사(廣津詞)가 있어 용()에게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였다. 용당산은 지금의 한강호텔 자리에 있었다. 너무나 경치가 아름다워서 폐세자의 길을 떠나던 양녕대군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진다. 문제는 여기서 말한 광진사는 양진사(楊津詞)를 잘못 옮겨 쓴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양주 조()에 양진사가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 때에 네 방위의 영험한 강에 제사를 지내는 곳 중에서 하나인 북독(北瀆)이었다. 이렇듯 문헌의 근거까지 위작하면서 광진구의 명칭을 합리화 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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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7/27 [07:40]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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