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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이
전미화 글, 그림 / 문학과지성사 / 어린이책시민연대광진지회 유명자 회원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7/12/15 [15:46]

나는 요즘 갈수록 건조해져서 어떤 때는 내 속에서 파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또 어떤 식으로든 하루에 혼자 있는 때가 잦다. <미영이>는 말라버린 내 속에 물기를 전해주고, 쓸쓸한 내 시간을 덥혀주는 그런 그림책이다.

 

▲ 미영이     © 디지털광진

이 그림책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건 하얀 여백이다. 그만큼 미영이를 포함한 모든 배경과 대상이 최소한으로 등장한다. 색도 먹 하나다. 간결하기는 글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로 화면을 채우지 않은 그림책을 예전에는 째려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미영이>를 보는 내 눈은, 세상에 던져진 미영이를 따라가 보고 그 마음을 가늠해보느라 여백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하얀 종이 위에 내가 그리는 이미지가 살아났다 사라졌다 한다.

 

미영이의 속내를 드러내는 글은 얼핏 건조하게 느껴지는데, 앞에서 말한 나의 말라비틀어진 건조함과는 완벽하게 다르다. 성급히 어떤 판단에 이르게 하는 지나친 물기나 기름기를 걷어낸 결정의 건조함이랄까. 그래서 언제든 되살아난다. 건조한 텍스트는 읽는 이를 지나면서 그의 촉각을 건드려 다시 수분이 솟고 영양이 돌게 한다. 짧은 글이지만 수없이 많은 행간을 담아내는 것이다. 물론 그림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실제 아픔 속에 있는 어린이에게서 나오는 말은 치장하면 죽는다. 사실 모든 어린이의 말이 그렇다. 작가는 순간순간에 솔직한 미영이의 말과 흐름으로 글이라는 텍스트를 죽이지 않고 살려냈다.

어느 날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서 소식이 없는 엄마. 미영이는 어찌어찌하여 대가족이 사는 집의 식모살이로 들어간 듯하다. 주인집 아이가 가방 메고 등교할 때 미영이는 조그만 손을 설거지통에 담근다. 한글도 잘 모르는 자신이 너무너무부끄럽고, 몸이 아파도 걱정해줄 사람 하나 곁에 없다. 가슴에 눈물이 차오르면 미영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엄마를 원망한다. 엄마가 그립다.

하루는 주인 잃은 강아지가 집으로 흘러들어온다. 자기네들끼리는 잘 챙기지만 버려진 강아지 하나 어쩔 줄 모르는 주인집 식구들 대신, 뒤치다꺼리는 미영이 몫이다. 밤마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면 미영이는 투덜대면서도 마당으로 나가 제 손가락을 물려준다. 안정을 되찾은 강아지와 그 옆에 쪼그려 앉은 미영이의 뒷모습.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는 두 존재지만, 그들이 나누는 교감의 과정은 하얀 여백을 가득 메운다.

이 책의 눈 내리는 장면도 좋다. 세 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미영이의 마음속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 같다.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 맞는 생일날에 내린 눈, 이듬해 다시 찾아온 겨울에 펑펑 내린 눈.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가 소리 있게 흐르는 미영이의 눈물을 꾹꾹 눌러 덮는다. 엄마와 다시 만나고도 처음엔 데면데면했지만, 자기처럼 설거지통을 무수히 드나들었을 엄마의 차디찬 손을 잡고, 그 냄새를 맡고, 엄마가 우는 걸 본 뒤에야 미영이는 제 온기를 내어준다. 이때 마지막 장면에서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은 그래서 따듯한 눈이다.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다.

주인집 엄마와 아이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는 미영이 장면도 얘기하고 싶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커다란미영이가 등장하는데 나 좀 보라고, 내 마음이 어떤지 아느냐고 말없이 소리친다. 타인을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이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사고하는지 모른다. 상대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기보단 나와 다른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동정하려 든다. 나보다 못해서 가여워하는 마음은 상대에게는 독이다. <미영이>의 작가는 미영이의 안타까운 상황을 왈가왈부하지 않으며 미영이의 마음을 지레짐작하지 않는다. 때론 야속하고 때론 거칠고 때론 서러운 세상에서, 미영이가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지켜주었다. 그때 그리 생각하고 그리 살았던 미영이를 거기에 그대로 있게 해주었다.

작가가 헌사에 썼듯이, 이 책은 어른이 된 미영이에게 바치는 그림책이다. 어른이 된 미영이는 틀림없이 움직이는 가슴으로 <미영이>를 보고 있을 것이다. 무례하게 위로하려 들지 않기에 진심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 미영이와 똑같진 않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의 부재로 슬픔이 내재했던 나 역시 그렇다. 위로받든 그저 미영이를 알게 될 뿐이든 이 책은 미영이를 기억한다. 미영이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에 있든 세상 모든 미영이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을 써주신 유명자 님은 어린이책시민연대 광진지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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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15 [15:46]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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