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촌에서 나고 자란 촌사람이다. 옛날에는 촌스러운 게 몹시 창피하게 생각되어 촌사람 아닌 척도 했었다. 그런데 촌에서 살았던 만큼 도시에서 살다보니 촌사람이었던 지난날이 큰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순이 어디 가니」를 읽고 나서 언니가 했던 말 한마디가 생각났다.
"난 해질녘이 되면 그렇게 서글프다. 어떨 때는 눈물이 나기도 해"
맞다. 종일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다가도 해질녘이면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던 우리였다. 그 품을 떠나서 부모가 되고 보니 해질녘이 되어도 그때처럼 부모님의 품을 찾아 돌아갈 수도 없고, 고향집은 더 이상 그때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해질녘이면 그리움이 서글픔으로 밀려오나보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언니의 말이 공감이 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어느 봄날에 시골마을에 사는 ‘우리 순이’가 새참을 내가시는 엄마를 따라가며, 보고 느끼는 것들을 세밀화로 풀어낸 이야기다. 첫 표지부터 사실적이다. 집, 야트막한 담장, 햇볕을 등에 받으며 나물 뜯는 할머니와 아이들, 아직 다 푸르러지지 못한 산과 듬성듬성 예쁜 분홍 꽃들. 이제 막 시작된 봄 풍경과 농사를 시작하는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몇몇 그림들은 실제 내가 자란 시골마을과 비슷해서 놀라기도 했다.
사실 이 책은 내용만 놓고 보면 별 게 없다. ‘우리 순이’가 새참을 내가는 길에 돌담 위 다람쥐, 뽕나무 들쥐, 보리밭 청개구리, 당산나무 옆 무서운 장승, 무논의 백로, 산속 뻐꾸기와 참나무 딱따구리를 만나고, 그들은 모두 ‘우리 순이 어디 가니?‘ 하고 묻는다. 그러면 순이는 반가워도 했다가 장난도 쳤다가 때로는 무서워서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새참을 가져다 드리고는 집에서 기다릴 어린 동생이 걱정되어 그 길을 바삐 되돌아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 책을 펼치는 순간 흐뭇하게 순이의 발길을 뒤따르게 된다. 그림을 보며 순이와 동행하는 기분까지 든다.
어쩌면 내가 이런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이 이야기에 쉽게 공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연스레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났다. 잊어버릴까봐 ’막걸리 한 되 주세요‘ 를 되뇌며 막걸리 심부름하던 기억, 심부름 길에 만난 어른들은 모두다 꼭 아는 체를 해주셨다. 이름을 부르시거나 이름을 모르면 ’아이 ~ 머시야‘ 라고 하시면서 어디 가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시며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다. 끼니때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고 끼니를 챙겨주시고, 특별한 반찬이라도 있으면 앞집, 뒷집 두루 나누어 먹던 그런 정이 넘쳤다. 그때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그곳의 냄새, 색깔, 소리 들이...
딱 이맘때면 내가 촌사람이던 그 시절 그곳은 이런 모습이었다. 못자리를 손보고, 내내 말라있던 논도랑에는 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매화꽃, 복숭아꽃, 치자꽃, 천리향이 꽃을 피워 동네 골목골목 향이 진동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봄이 되면 생각나는 풍경이다.
책을 덮으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순이는 자연과도 어른들과도 잘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는 축복받은 아이라는 것과, 어쩌면 내 또래가 마지막 순이 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글을 써주신 이지영 님은 어린이책시민연대 광진지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