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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 한반도 중서부에서의 백제⋅신라의 영토교환」
광진문화원 출간 ‘삼국한강’수록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 논문 요지.
 
디지털광진
 

최근 광진문화원은 한강의 옛 역사를 중심으로 한 학술집인‘삼국한강’을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쓴 「6세기 중엽 한반도 중서부에서의 백제⋅신라의 영토교환」와 「아차산보루군의 발견 경위와 과정」을 비롯해 한국외대 사학과 여호규 교수의 「4~6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적학과 이도학 교수의 「漢江流域 支配權의 變遷 考察」, 동북아역사재단 김현숙 책임연구원의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본 5~6세기 고구려 南邊의 상황」등의 논문이 수록돼 있다.

 

「디지털광진」 에서는 지난 2월 광진구의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쓴「아차산보루군의 발견 경위와 과정」을 홈페이지에 올린 바 있으며, 이번에는 「6세기 중엽 한반도 중서부에서의 백제⋅신라의 영토교환」의 요약본을 올린다. 원본은 별도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6세기 중엽 한반도 중서부에서의 백제⋅신라의 영토교환」

 

                                                               향토사학자 김민수

 

 

▲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 디지털광진

   신라의 북진의 첫 증표로 일컬어지고 있는 국보 제198호 「단양신라적성비」는 신라가 550년경에 이곳 충북 단양까지 진출하여 고구려를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여 세운 공적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비석이 세워진 단양의 원래 지명은 적산(赤山)이었다. 적산을 이후에 달리 부른 명칭이 적성(赤城)이다. 삼국시대의 적성은 경기도 안성천하구 일대였다. 따라서 충북 단양의 적성에서는 신라와 고구려가 싸운 사실이 없다. 비석에 새겨진 적성인들은 내륙 단양의 적성인들이 아니고, 서해안 바닷가 안성천하구의 적성인들이다. 비석에 공훈자로 새겨진 서해안 안성천하구의 적성인들의 도움을 받은 신라는 550년 경에 죽령 서쪽에 주둔하였던 고구려군을 모두 내쫓았다. 고구려는 서해 바다에서 안성천하구를 통하여 보급되는 병참을 그 곳의 적성인들의 배반으로 받지 못하여 패배한 것이다. 이러한 안성천하구의 적성인들이 고구려를 배반하여 신라를 도운 사실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단양신라적성비」다. 신라가 비석을 세울 만큼 감격한 이유는 고구려를 내쫓은 서해안까지의 통로를 확보하여 서해로 나아가는 바닷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이 백제의 영토를 경유하지 않고 중국 당나라로 직접 갈 수 있는 바닷길이다.

 

  이러한 신라의 기세를 이용하여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했다. 『삼국사기』열전 거칠부전과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가 먼저 서해안을 따라 황해도 지경까지 북진하였다. 다음에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고구려의 10군 지역을 빼앗았다. 그 기념비가 함경남도의 북단을 감싸는 고현에 세워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이다. 이러한 신라의 북진은 당사국인 『삼국사기』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에도 각각 10군을 빼앗고, 빼앗긴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먼저 공격하여 평양 지경까지 북진한 백제와 이곳을 빼앗긴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용을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열전 거칠부 전

  진흥왕 12년(551년), 왕이 거칠부----등 8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했다. 백제인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이북에서 고현 이내의 10군을 취했다.

 

  『일본서기』흠명천황 12년(551년)

  이해에 백제의 성왕이 친히 자기 나라와 二國[二國은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의 병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되찾았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쳤다. 모두 6군의

  땅을 회복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년)

  왕이 거칠부 등에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여 이김에 따라 10개 군을 탈취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양원왕 7년(551년)

  신라군이 내침하여 10성을 빼앗았다.

 

  신라가 북진하여 고구려의 10군(성)을 빼앗은 것은 위의 문헌기록과 함경남도에 세워진 불멸의 증표인 「마운령비」와 「황초령비」가 증거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두 나라의 협공을 주도하여 먼저 고구려의 경내로 북진한 백제의 사실도 뚜렷하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서는 백제의 북진과 고구려의 패배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당시 고구려는 북쪽으로부터 돌궐병의 침입을 막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백제군을 막는 데에 허술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백제가 북진하여 빼앗은 평양지경은 고구려의 도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대로 둔다면 고구려의 도성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고구려는 곧바로 대응하여 백제군을 물리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판단은 그 이전 백제의 근초고왕과 태자(후에 근구수왕)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아들 근구수왕은 377년에 재채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는 곧바로 대응하여 백제를 공격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551년에 있었던 백제의 북진은 실패했다. 뒤이은 신라의 북진만이 고구려로부터 10군의 땅을 빼앗고 지킨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에 빼앗고 빼앗긴 사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백제는 잠깐 북진했다가 고구려의 반격으로 되밀렸다. 따라서 이때의 사실을 자기 나라의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재하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잠깐의 수치를 기억해 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551년 경에 서해안을 따라 북진하였던 백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뒤이어 동해안으로 북진했던 신라만이 고구려로부터 10군의 땅을 빼앗았다.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안성천하구까지도 빼앗고 있어서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뱃길도 열려 있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서⋅북진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화친을 서둘렀다. 이를 눈치 챈 백제는 고구려로 기울어가는 신라를 자기편으로 묶어 두기 위하여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영토교환이다. 먼저 서해안의 안성천하구까지를 신라로부터 받아내서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백제의 영토를 봉합하는 것이다. 대신 한강하류의 위쪽인 한성(지금 서울)까지를 신라에게 넘겨주는 결단을 내렸다. 백제의 속셈은 신라를 한강하류의 위쪽 한성까지 끌어 올리더라도 그 아래쪽 하구 지역에서 한강을 봉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경계선은 북한산 능선 상에 세워진 「북한산진흥왕순수비」다. 그 너머 한강하구 지역은 백제의 땅으로써 옛 명칭은 개백현이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가 된다. 이러한 한강 봉쇄작전의 염려를 없애 주기 위해 백제의 성왕은 자기의 왕녀를 신라 진흥왕의 소비(小妃)로 보냈다. 일종의 볼모인 셈이다.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14년(553년)

  7월에 백제의 동북지방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10월에 백제 왕의 딸을 취하여 소비로 삼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31년(553년)

  7월에 신라가 우리의 동북변을 취하여 신주를 두었다.

  10월에 우리의 왕녀가 신라로 시집갔다.

 

  『일본서기』흠명천황 13년(552년)

  이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했다(棄). 신라가 이로 인하여 한성에

  들어갔다. 지금의 신라의 우두방⋅니미방이다.

 

  위의 문헌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는지금의 서울인 한성을 포기했다. 오직 서해안의 안성천하구를 되찾고 한강하구까지 봉쇄하여 신라의 서해로의 진출을 통제하려고 했다. 신라로써도 한강하류의 위쪽 한성까지는 551년에 북진하여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10군 지역과 합쳐진다. 신라의 영토가 서쪽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세력이 버티고 있는 한강하구의 고양시 일대는 썰물 때에는 갯벌이 펼쳐져 있고, 밀물 때에는 바다처럼 넓어서 신라의 선박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이 한강하류에서의 지리적 이점을 각기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백제와 신라는 획기적인 영토교환을 쉽게 마무리지었다.

 

  고구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나제동맹은 파기되었다. 백제의 성왕은 신라를 침공하기 위해 충북 옥천의 관산성까지 진군하였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참살당한다. 이후 신라는 한강하구가 시작되는 곳의 북안에 당항성(지금의 행주산성)과 그 맞은편 남안에 양천고성지를 구축하여 그들의 선박이 서해로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를 막기 위해 백제는 새로운 파트너인 고구려와 힘을 합쳐 신라의 당항성을 협공했다. 신라 또한 서해안의 안성천하구를 되찾아서 그 전처럼 백제의 영토를 두 동강 내려고 했다. 신라가 충남 천안까지 진격하여 백제와 싸웠던 『삼국사기』열전 소나전에서의 사산전투다. 두 전투는 백제와 신라가 영토교환 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서로 간의 보복전이었다. 이처럼 한강하류 유역에서 삼국 간의 첨예한 대립은 이를 유용하게 이용한 당나라의 정략과 맞물려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6세기 중엽 한반도 중서부에서의 백제⋅신라의 영토교환’원문보기


 
기사입력: 2015/11/19 [18:05]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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