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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唐연합군의 백제정벌루트의 재검토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 논문. 문화원 향토자료집 ‘아차산성’수록
 
향토사학자 김민수
 



최근 광진문화원은 향토사료집 ‘아차산성’을 발간하였다. ‘아차산성’에는 광진구의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쓴 ‘羅唐연합군의 백제정벌루트의 재검토(Ⅱ)를 비롯해 한백문화재연구원 서영일 원장의 ’삼국항쟁과 아차산성‘, 세종대박물관 황보경 학예사의 ’한강유역의 신라 유적과 아차산성‘ 등 3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아차산성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은 아차산성에서 신라군이 수군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전초기지라고 주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한 백제의 계백장군이 신라의 5만대군과 결전을 치른 황산벌이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 인근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시 인근이고 계백은 충신이 아니라 역신임을 주장해 고대사학계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러한 김민수 선생의 논문의 요약본을 디지털광진에 게재한다. 아울러 원문은 별도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羅唐연합군의 백제정벌 루트의 재검토(Ⅱ)」의 요지.
 
                                                                                 향토사학자 김민수
 
  삼국통일의 전초전으로서의 황산벌 전투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황산벌은 충청남도 논산 부근이며 이때 신라군을 막다 장렬히 전사한 백제군의 장수는 계백이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군의 예봉을 꺾기 위하여 앞장서 싸우다 꽃다운 나이에 전사한 반굴⋅관창 두 화랑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황산벌 전투는 신라군이 백제의 국경을 넘어 진격하는 과정에서 처음 맞닥뜨린 전투다. 황산벌 전투를 힘겹게 이기고서야 신라군은 당나라 수군(水軍)이 660년 7월 10일에 상륙한 금강하구(현재 익산시)까지 하루 늦게 도착하였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신라군이 그들이 상륙할 곳을 먼저 와서 선점하는 수고를 하지 않은 신라군의 선봉장 김문영을 참살하려고 하였다. 뒤따라온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너희들 당군이 우리가 치른 황산벌 전투를 모르고 다그치는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결국 화해가 이루어진 두 나라(羅⋅唐)는 금강변을 거슬러 올라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에 있었던 백제의 왕성인 사비도성을 함락시켰다. 웅진성(현재 공주)으로 피신하였던 백제의 의자왕도 7월 18일 사비도성으로 되돌아와 항복하였다. 경상북도 상주의 금돌성에 머물고 있던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의자왕이 열어준 통로를 통하여 7월 29일 사비도성에 도착하여 8월 2일 항복의례를 열었다. 이때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패왕 의자가 따라 올린 술잔을 높이 들고 백제정벌의 성공을 자축했다.
 
  당나라의 13만 水軍(수군)은 서해의 덕적도에 머물고 있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경기도 이천에 있었다고 하는 남천정에서 100척의 병선을 이끌고 6월 21일 덕적도에 가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만났다. 두 나라의 장군은 7월 10일 백제의 南(남)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백제의 南은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는 금강하구다. 당나라 수군은 덕적도에서 뱃길로 오는 것이므로 거침없이 금강하구까지 올 수 있다.
 
  그러나 신라군은 다르다. 김유신 등이 덕적도에서 서해안 지경으로 돌아오는 것은 물때를 맞춰야 하므로 3일의 일정이 소요된다. 6월 23일쯤이 될 것이다. 또한 경기도 이천까지 돌아와서 급히 출정준비를 하더라도 최소한 2일의 여유가 필요하다. 6월 25일에야 출정이 가능한 것이다. 7월 10일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보름(15일)여에 불과하다. 이 기간 동안에 신라의 5만 대군은 백제의 동쪽 경계를 마주하면서 신라의 西변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천⋅진천⋅청주⋅대전을 거쳐 충청남도 금산군까지 내려와야 한다. 이곳에서 백제의 서쪽인 논산 황산벌로 진격할 수 있다. 신라의 5만 대군은 이러한 이동경로를 따라 자기네 나라에서 행군하여 이곳까지 오는 데에도 보름여의 일정은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신라의 육로진격설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신라의 5만 대군이 신라군의 영역인 금산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가정하도록 하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유신 등 신라군의 수뇌부들은 이곳까지 와야 한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5일이 소요될 것이다. 6월 30일이 되어야 올 수 있다. 남은 기간은 고작 10여일 밖에 안 된다. 이 기간 동안 신라군은 백제의 동변 국경을 뚫고 西進(서진)하여 논산의 황산벌까지 진격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라군의 진격로에 있는 백제의 동변은 굳건한 방위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충청북도 옥천군에는 백제의 성왕이 참살당한 관산성이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에는 「삼국사기」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취도와 김흠운이 전사한 조천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두 나라의 경계로 영욕이 얽혀있는 최대의 접전지역이다. 신라군은 이러한 지역을 뚫고 한참을 진격하여야 논산의 황산벌에 닿을 수 있다. 더구나 삼국말기는 백제가 신라보다 군사력이 우세하였다. 백제의 의자왕은 즉위 다음해인 642년에 동쪽으로 진격하여 신라 西변의 40여성을 빼앗았다. 같은 해 경상남도 합천의 대야성까지 쳐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의 딸과 사위까지 죽였다. 그러나 열세였던 신라는 강한 백제를 응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김춘추 자신이 직접 적대국인 고구려를 찾아가서 백제정벌을 요청하였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우화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백제의 땅을 열세였던 신라의 5만 대군이 10여일의 짧은 기간 동안 어떠한 전투도 없이 논산의 황산벌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은 작전이 아니라 기막힌 요행이다.
 
  천 번 양보하여 아예 문헌기록을 무시하고자 한다. 김유신 등 신라군의 수뇌부들만이 남천주에서 출발하여 신라의 西변까지 도착 가능한 날짜인 7월 1일에 신라군은 어찌되었든 간에 백제의 동쪽 국경선을 뚫고 황산벌까지 와서 첫 전투를 치르고 승리하였다고 하자. 그래도 의문점은 ‘왜 백제군이 싸우기 힘든 벌판인 황산벌에 진을 첬을까’ 하는 것이다. 황산벌의 주위에는 모촌리산성⋅산직리산성⋅황령산성⋅청동리산성이 에워싸고 있다. 북쪽의 主城(주성)으로 보이는 황산성까지 거들면 이 지역은 백제의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러한 성들을 함락시키지 않고 신라군은 진격할 수 없다. 병참선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요행히 주위의 성들까지도 접수하고 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진격하는 데에는 최소한 5일의 일정이 필요할 것이다. 약속시간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5일밖에 없다. 소정방의 당 수군은 서해의 덕적도에서 출항하여 금강하구까지 어김없이 7월 10일에 상륙하였다. 상륙전을 치르고, 선박을 정박시키고, 병참과 병기를 내려놓는 작업은 하루가 걸릴 것이다. 따라서 신라군과 만나는 7월 11일까지 당군의 본영은 금강하구에 있었다. 신라군은 이 5일 동안에 금강하구까지 가서 당군과 합류하여야 한다. 그러나 논산의 황산벌에서 금강하구까지 신라군의 진격로에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백제의 성들이 포진하여 있다. 이러한 성들을 뚫고 신라의 5만 대군이 금강하구까지 5일 만에 진격할 수 있다는 것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거짓이다. 적국인 백제군의 안내를 받고 거침없이 행군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것이다. 설령 이러한 신라의 육로진격이 성공하였다면 백제의 영토는 황산벌에서 금강하구까지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나는 것이다. 당군의 원병도 필요 없이 백제는 신라에 의하여 멸망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육로로 진격하였다는 가상은 백제의 성들로 짜여진 그물에 신라의 5만 대군이 물고기처럼 밀고 들어가면서 그 그물 속에 갇히는 형국이다. 금강하구까지는 고사하고 백제의 국경에 들어서면서부터 포위되어 이내 자멸할 것이다. 이러한 水(당군)⋅(신라군)의 양면작전을 당대의 명장인 소정방과 김유신이 계획했다는 자체부터 거짓이다. 신라군도 당군과 마찬가지로 한강하류의 한성에서 선단을 구성하여 서해로 나아가 금강하구에 상륙한 수군작전이었다.
 
  신라군은 한강하류의 위쪽 한성(지금의 동서울)에서 선단을 구성하여 수군으로 나간 것이다. 신라의 수군이 한강 하구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은 곳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의 강변이다. 황산(黃山)의 ‘山’은 높은 산이 아니다. 산수화(山水畵)가 뭍(山)과 물(水)의 총체로써 자연을 나타내는 것처럼 뭍(땅)의 개념이다. ‘黃’은 말 그래도 ‘누렇다’는 표현이다. 황산은 누런 갈대밭을 나타내는 강변이다. 흔히 말하는 둔치다. 그래서 곳곳의 강변을 황산이라고 부른다. 신라 탈해왕 조의 황산진구(黃山津口), 지마왕 조의 황산하(黃山河), 제사 조의 황산하 등도 강변에 연유한 지명들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지명으로 경기도 하남시의 한강변을 황산이라고 부른다. 전라북도 익산시의 망성연 금강변도 옛 지명은 황산이다. 그러나 당시의 논산에는 황산(벌)이라는 지명이 없었다. 충청남도 논산의 옛 지명은 황등산야(黃等山也)이었다. 후에 황산벌 전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황산이라고 고쳤다.
 

▲ 보물 235호 장의사지 당간지주(출처-문화재청)     © 디지털광진


 
  이러한 황산벌의 강변을 포괄한 경기도 고양시의 옛 명칭은 개백현(皆伯縣)이다.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려는 신라군의 선단을 현 고양시인 개백현의 황산벌에서 막은 백제의 장수가 개(계)백장군인 것이다. 그래서 개백장군의 명칭은 계백⋅개백으로 혼용하여 부른다. 이러한 사실은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반굴⋅관창의 두 화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는 장의사라는 절에서 확인된다. 장의사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지 않고 서울 종로구 세검정초등학교에 있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두 화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종무열왕이 직접 지시하여 지은 절이 장의사임을 밝혔다. 조선시대의 연산군은 이곳에서 놀다가 장의사의 타종소리를 듣고 헐게 하였다. 그리고 유흥을 즐기기 위해 꽃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행히 절의 깃발을 세웠던 「장의사지 당간지주」는 그대로 땅에 박혀 있어 보물 235호로 지정되었다. 황산벌 전투가 한강하류 유역에서 있었다는 불멸의 증표다. 그래야만이 당군과 신라군은 각기 서해에서 함선을 타고 내려와 금강하구에서 어김없이 660년 7월 10일에 만나는 상륙작전을 약속할 수 있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열전에 편별된 계백전이다. 그러나 계백전은 황산벌 전투 당시의 상황만을 기술하였다. 사랑하는 처자가 신라군에게 잡혀 노비가 되는 것을 염려하여 미리 죽이고 황산벌로 출정한 비장한 장수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는 사로잡은 화랑 관창을 되돌려 보낼 만큼 인자한 장수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계백장군은 신라군을 막지 못하고 전사한다. 이러한 기록이 전부다.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사로잡힌 백제의 관료는 최고 관등인 좌평 충상(忠常)과 다음 관등인 달솔 상영(常永)이 있었다. 좌평 충상은 그 이전 대야성 전투(648년)에서 참살당한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 부부의 뼈를 신라에게 돌려보내 주도록 의자왕에게 주청한 인물이다. 달솔 상영은 나당연합군 중에서 신라군을 먼저 치자고 제안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충청남도 부여의 사비도성에 있었다. 상영의 주장도 참작되어 두 사람은 한강하구의 東변 개백현으로 급파된 것이다. 상영은 신라에 대한 강경파이다. 여기에 한 계급 위인 대 신라 온건파인 충상을 함께 보내 강⋅온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들은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하여 신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 해 신라는 백제정벌의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이때 충상과 상영도 신라의 관등인 일길찬의 직위를 받았다. 이들은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투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해(661년)에 충상은 육두품의 최고 관등인 아찬으로 승진하여 사비도성을 공격하는 백제부흥군과 싸웠다. 고구려정벌 때(661년)에는 상주총관에 임명될 만큼 중용되었다. 바로 황산벌의 백제군의 총수는 충상이었다. 충상이 신라군에게 투항할 것을 선포한 결정권자였다. 그리하여 한강하구에서 묶인 신라수군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왜 이러한 충상을 계백이라고 고쳐 불렀을까. 김유신의 조카인 반굴과 진골 신분인 품일의 아들 관창의 전사는 가야계와 신라계의 대표적인 가문이 나라에 충성한 본보기이다. 이러한 충성에 대한 보답이 앞서 밝힌 장의사다. 그래서 「삼국사기」열전에 관창전을 편별했다. 따라서 이에 맞섰던 적장의 위상도 높여 맞춰주어야 했다. 그것은 몰락한 백제인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의 수뇌들은 투항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이러한 백제의 역신(逆臣)들을 전사한 신라의 화랑들과 맞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삼국사기」열전 4의 흑치상지이다. 흑치상지전은 시비거리가 없는 명확한 전기다. 흑치 지방을 분봉(分封)받은 상지가 흑치상지다. 常之(상지)와 황산벌의 忠常(충상)⋅常永(상영)은 같은 시대의 백제인으로서 ‘常(상)’자를 공유한 이름을 쓰고 잇다. 바로 상지가 흑치지방을 분봉받아 흑치상지라는 봉호를 얻은 것처럼 황산벌의 개백현을 분봉받은 것처럼 꾸몄다. 황산벌 백제군의 총수는 충상이다. 그가 개(계)백충상이다. 충상은 실재한 백제의 역신이므로 그 이름을 뺐다. 그래서 개(계)백이라는 분봉된 인물이 남았다. 이러한 개(계)백을 책에 따라 계백(堦伯)⋅개백(皆伯)⋅해백(楷伯)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한 것은 실재한 인물이 아님을 암시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로에 얽히게 하여 위작의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는 술수이다.
 
  신라군과 당군은 연합하여 660년에 각기 수군작전을 감행하여 백제를 정벌하였다. 이때 신라수군의 출정지는 한강하류의 위쪽 한성 일대였다. 한성 일대에서 수로(水路)를 관장하였던 신라의 관방은 사적 아차산성이다. 바로 신라의 북한산성이다. 668년 신라군의 고구려정벌 역시 「삼국사기」열전 김인문전에 따르면 이곳 북한산성에서 20만 대군을 출동시켰다. 이때 신라군의 선봉장은 백제정벌 당시와 마찬가지로 김문영이었다. 그가 도착하여 첫 전투를 치룬 곳은 ‘사천원(蛇川原)으로서 대동강 변이다. 그리하여 후발대와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한다. 고구려정벌 또한 신라군의 주력은 수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군은 수군작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차례 정벌하여 삼국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 거점은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지금의 사적 아차산성이다. 남⋅북한강이 합류하는 목을 틀어쥔 사적 아차산성은 삼국통일의 표석으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羅唐연합군의 백제정벌루트의 재검토(Ⅱ) 전문보기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은?

▲ 김민수    © 디지털광진

아차산에서 고구려의 보루성들을 처음 발견하고서, 향토사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아차산에 관계된 자료들과 고대 역사를 재조명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전국향토사연구논문 공모에서 두 차례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사료조사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기사입력: 2014/04/07 [12:40]  최종편집: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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