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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장군의 전사지」에 대한 요지
[특별기고]향토사학자 김민수선생 '온달장군'에 실린 글. 원문 링크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3/02/21 [16:44]
광진구의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온달장군의 전사지」에 대한 요지'를 주제로 한 논문을 '디지털광진'에 보내왔다. 이 논문은 20일 광진문화원이 발간한 향토자료집 '온달장군'에 수록된 동일제목의 논문을 요약한 것으로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에 나오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온달장군의 전사지가 현재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성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간이 되는 분들이라면 책자를 구해 원문을 읽어보거나 이 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바쁘신 분들은 요지라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린다.(편집자 주)
 
▲ 사적 234호 아차산성     © 디지털광진

 
      
      온달장군의 전사지」에 대한 요지

                                                                              향토사학자 김민수

 온달장군의 설화는 『삼국사기』열전 편에 기록되어 있다. 저잣거리의 바보온달과 구중궁궐의 공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극적인 이야기다. 당시의 신분사회에서의 파격적인 두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평강공주는 미천한 온달을 몸소 찾아가서 결혼을 자청한 자주적 여성이다. 그러한 온달을 받들어서 일약 대장군을 만든 내조의 여성이다. 온달이 전사했다는 부음을 받고 전장터까지 달려와서 그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간 사랑의 여인이다. 온달 또한 그러한 평강공주를 만나는 행운을 헛되지 않게 꾸려 입신양명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 보은으로써 국가에 몸 바쳐 충성했다. 그들의 사랑의 마무리 역시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끝마친다. 참으로 멋진 설화다.
 
  그러나 온달장군의 전사지에 대한 두 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한강하류의 사적 아차산성이라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남한강상류의 단양 온달산성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두 견해의 발단은 서울의 阿且成(아차성)이라는 지명과 단양의 乙阿且縣(을,아차현)이라는 지명의 『삼국사기』에 각기 기록되어 있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유독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단양의 온달산성이 온달이 쌓았다는 기록들이 『여지도서(與地圖書)』,『충청도읍지』,『증보문헌비고』등에 실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온달장군의 전사지가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기울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온달산성의 주위를 온달관광지구로 지정 받아 본격적인 계발까지 완료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학술적인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진 바에 따르면 단양의 온달산성은 신라가 쌓은 성으로 밝혀졌다. 그 주위에서 고구려의 유적· 유물은 전연 찾아볼 수 없었다. 고구려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출정했다는 온달의 명분은 이 지역에서는 인정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서울의 아차산 일대에는 고구려의 보루성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적 455호인 아차산보루군이다. 고구려가 한강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고고학적 자료들이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온달장군의 전사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온달이 출정할 당시(590년 이후)에 고구려는 북쪽으로부터는 중국 수제국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세 차례나 큰 침입이 있었다. 잘 알려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년)도 그 중 하나다. 이 틈새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쪽에서는 동쪽의 신라와 서쪽의 백제가 한 치 양보없는 접전이 벌어졌다.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옛, 蛇山)지역에서는 '사산의 경계는 백제와 신라가 뒤섞여서 서로 침입하고 노략질하여 공격이 없는 달(634~647년)이 없었다'라고 했다. 백제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554년),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참살당한 대야성 전투(642년), 양산가를 지어 부른 조천성 전투(655년) 등이 그렇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군작전을 감행하여 서해안으로부터 백제와 신라의 겹 방어선을 뚫고 단양의 온달산성까지 진격할 가능성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고구려군이 남한강상류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남진한다면 강원도 평창군의 산성들뿐만 아니라 영월 정양산성, 청풍 망월산성 등을 공파하여야만이 단양의 온달산성까지 진격할 수 있다. 그러한 기록은 없다. 있다면, 고구려의 보장왕은 청병사(請兵使)의 자격으로 찾아온(642년) 신라의 김춘추에게 죽령의 西 · 北 땅을 돌려달라고 압박한 사실이 있다. 644년에 가서는 화친사(和親使)의 자격으로 찾아온 당나라의 현장에게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신라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500리의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서로의 전쟁은 그칠 수 없다' 고 하여 신라와의 화친을 거절했다. 이때의 돌려달라고 한 500리는 백제의 땅을 건너서 '죽령의 서쪽'의 땅이 될 수 없으므로 신라의 북쪽 변경으로써 '죽령의 북쪽'의 땅이다. 고구려로서는 남쪽 변경의 땅이 된다. 이처럼 신라의 북쪽 변경은 644년까지도 고구려의 남침을 견고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따라서 문헌사의 기록에서도 온달이 출정할 당시에 고구려군이 단양의 온달산성까지 진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찾아볼 수 없다.
 
 서울의 아차성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을 적에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빼앗았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아예 도망가는 백제의 개로왕을 잡아와서 아차성 밑에서 참살한다. 그래서 백제는 충청남도 공주까지 밀려났다. 신라가 한강하류 유역(지금 서울)을 차지하고 있을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는 두 차례에 걸쳐서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첫 번째는 603년에 고구려의 영양왕이 고승(高勝)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공격한 전투다. 전갈을 받은 신라의 진평왕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서 한강을 건너 북한산성에 들어와서 고구려군을 격퇴시켰다. 두 번째는 661년에 고구려의 보장왕이 장군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를 시켜 북한산성을 공격한 전투다. 고구려는 수군(水軍)으로 한강하류로 진입하여 서쪽에, 말갈군은 기병(騎兵)으로 와서 동쪽에서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러한 작전은 한강하류의 북안(北岸)에 버티고 있는 사적 아차산성에서만 가능한 상황이다. 실지로 사적 아차산성의 시굴조사 결과 北· 漢· 山(북· 한· 산)의 글씨가 새겨진 기와편들이 많이 채집되었다. 따라서 사적 아차산성은 백제의 아차성이 아니다. 신라의 북한산성인 것이다. 다행히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에서 아차산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별봉(지금 워커힐호텔 뒷산)에 두 개의 성곽을 표시했다. 이를 설명한 『대동지지(大東地志)』는 한강 북안(北岸)의 양진성(陽津城)은 한강 남변의 풍납토성(平古城)과 한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다. 양진성에서 거슬러 올라간 정상에는 성터가 잘 남아 있는 아차산고성(峨嵯山古城)이 있다고 했다. 아차산고성은 돌로 쌓아서 성곽의 유구가 뚜렷이 남아 있는 사적 아차산성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와서 한강의 북안(北岸)에 닿는 곳에 있는 성곽이 양진성이다. 양진성은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된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지인 「구의동태봉유적」이다. 유감스럽게도 배수장(1993년 준공)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삭평했다. 지금은 배수지 운동장이라고 한다. 청동기시대부터 역사의 맥을 이어온 태봉유적지에 있었던 양진성이 백제의 아차성이다. 또한 『동여도(東與圖)』에서는 두 성곽을 잇는 능선의 중간 남쪽에 고양주(古,揚州)를 표시했다. 홍련봉보루성의 남쪽이다. 지금의 광장초등학교 지경에 해당한다. 그러나 두 지도에서 홍련봉보루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기』지리지는 이러한 고양주와 홍련봉보루성을 묶어서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했다. 대동강 가의 평양과 구별하여 흔히 남평양이라고 부른다.
 
 한강하류의 북안(北岸)의 아차산 별봉(지금 워커힐호텔 뒷산)에는 삼국시대의 세 나라의 성곽들이 한강과 맞닿는 구릉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차례차례 축조되었다. 처음에는 한강과 맞닿는 구릉에 백제의 아차성(胎峰)이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서는 고구려의 평양의 치소성(홍련봉보루성)이 있었다. 마지막 신라시대에는 별봉의 정상에 북한산성(지금 사적 아차산성)을 축조했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순서에 따라서 공격하기 어렵게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성곽을 쌓은 것이다.
 
 온달이 출정할 시기(590년 이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싸움은 제1차(603년) 북한산성 전투다. 이때의 상황을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양왕 조에서는 자기 나라의 고구려군이 퇴각하게 되는 상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서 제1차 북한산성 전투는 고구려군이 참담한 패배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진평왕이 몸소 이끌고 온 지원군까지 가세한 북한산성의 전투에서 퇴각하는 고구려군은 그들이 상륙하였던 아차성 아래의 강변에서 함선에 승선하여 한강하구를 빠져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철수작전에서 온달장군은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고구려의 패장 고승(高勝)이 온달장군인 것이다.
 
 온달이 고승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단서가 있다. 온달전에서 평강공주의 혼처가 상부 고씨 집안이었다. 평강공주가 아니 가겠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왕실의 혼사의 결정권이 당사자인 평강공주에게는 없었다. 또한 수제국에 맞섰던 고구려의 군주가 저잣거리의 미천한 바보온달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이다. 온달전의 저자는 계급사회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온달전을 편별한 것은 『삼국사기』를 저술한 당시(1145년)에 고려가 처한 위기를 민중의 힘을 빌어서 타개하려고 했다. 최상위의 귀족인 평강공주를 내세워 미천한 온달을 일으켜 세웠다. 사회의 저변에서부터 쇄신의 바람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그 미끼는 누구나 국가를 위해서 충성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은을 누릴 수 있다는 예시다. 평강공주가 온달이 전사했다는 급보를 받고 전장터까지 와서 그 시신을 수습한 것도 사실이 아니다. 급박한 전장터에서 그렇게 애처로운 사랑의 드라마를 꾸밀 여유는 없다. 저자의 의도는 여자들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저 없이 참여하라는 메시지다. 후일 행주대첩(1593년) 때의 행주치마의 유래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와해될 수 있는 가정을 굳건히 지켜야 할 몫이 미망인들에게 있음을 의연 중에 암시했다. 그 굴레 또한 사랑으로 포장했다.(글 원문을 읽어보실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원문 : 온달장군의 전사지.pdf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은?

▲향토사학자 김민수    © 디지털광진
아차산에서 고구려의 보루성들을 처음 발견하고서, 향토사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아차산에 관계된 자료들과 고대 역사를 재조명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전국향토사연구논문 공모에서 두 차례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사료조사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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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2/21 [16:44]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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