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이 그린 「광진」. 조선시대 [정선이 그린 「광진」. 조선시대]
 
한강개발이전의 뚝섬유원지(1970년대)
 
한강의 돛단배
광나루 너븐나루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광진(광나루, 너븐나루)은 광장동에 있던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으로 상고시대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조에는 이곳에 수참을 설치하여 한강의 조운로를 관리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좌수참을 두고 강원, 충청, 경기 등지에서 서울로 오는 세곡의 운송관리와 범죄자 등의 출입을 감시하였다.

한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문화가 집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도 많아져 더욱 번성하다가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너븐나루 광진은 광진구가 성동구에서 분구 되면서 광진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광진의 유래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는데,

광진구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은 현재 광진(廣津)으로 불리는 곳이 실제로는 양진(楊津)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관련기사 : 광진구(廣津區) 지명에 대하여

 
광진구항공사진
광진구항공사진
 
광진구 전경

옛날 광진구는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강유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아차산을 중심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광나루와 뚝섬나루는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서울 동쪽의 교통 요충지로 한강을 통하여 올라오는 각 지방의 산물과 문화가 집산을 이루어 번성을 이루었던 서울의 관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넓은 구릉과 벌판이 펼쳐져 있는 말목장이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풍경으로 낙천정과 화양정이 세워져 많은 양반님들과 묵객들이 머물며 풍류를 즐기며 서정을 읊었던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오늘날 광진구는 서울의 한강 상류에 접한 지역으로 아차산 자연공원, 어린이 대공원, 한강시민공원 등의 공원이 있어 구민들에게 쉼터와 녹지를 제공하고 있으며 어린이 회관,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의 문화관광 자원과 건국대학교, 세종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 등 3개의 대학, 초등학교 21개, 중학교 12개, 고등학교 9개가 있는 교육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곳이다.

또한 지하철 2호선, 5호선, 7호선이 지나가며 동서울터미날, 7개의 교량(광진교,천호대교,올림픽대교,잠실철교,잠실대교,청담대교,영동대교)이 연결된 교통의 요충지로 동부서울의 관문이며, 지하철 역세권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자(테크노마트21), 의류(건대역 로데오거리) 가구거리(중곡동 가구거리-군자역)등 특화된 상가지역이 발달되어 있다.

 
광진구 상징마크

1949. 8.13. 고양군 뚝도면을 편입하여 뚝도출장소 설치

1950. 3.15. 편입지역 지명 里를 洞으로 개칭

1968. 1.11. 뚝도출장소를 폐지하고 관할구역을 성동구 직할로 편입

1973. 7. 1. 잠원, 서초, 양재동 면목동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

1975.10. 1. 성동구를 성동구와 강남구로 분구

1977. 9. 1. 구의동에서 광장동을 분동

1978.10. 1. 중곡1동을 분할하여 중곡1,3동으로, 자양동을 자양1,2동으로 분동

1980. 7. 1. 중곡2동을 분할하여 중곡2,4동으로 송정동을 분할 송정동과 군자동으로 분동

1985. 9. 1. 자양1,2동을 분할하여 자양1,2,3동으로 분동

1988. 7. 1. 능동 일부와 광장동 일부를 분할하여 구의2동을 설치

1995. 3. 1. 성동구를 광진구와 성동구로 분구

▶ 구의동
잠실 수중보와 테크노마트21
 
서울 광진우체국

구의동의 동명은 일제초 1914년 4월 1일에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고양주면(古楊州面)의 구정동(九井洞)과 산의동(山宜洞)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으로 편입될 때 구정동의 「九」자와 선의동의 「宜」자를 따서 구의리(九宜里)가 된 것이다.

구의동은 양주군 고양주면의 구정동 산의동외에 율동(栗洞)지역과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능동(陵洞) 각 일부가 통합되어 구의리가 되었으므로, 현재 능동 인접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漢城府) 두모방(豆毛坊-城外) 전곶계(箭串契) 능동(陵洞)의 일부였다.

구의리의 동 명칭이 구의동이 된 때는 1949년 8월 15일에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 전부가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편입되어 성동구 구의리가 외었으나 그 이듬해 1950년 3월 15일에 구의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구의동에 통합되기 전의 구정동은 9개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구정동으로 불리어 졌으며 구정동 내에도 주막(酒幕)거리·웃말·아랫말이 각각 있었다. 산의동은 산비탈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어 졌다고 한다.

▶ 군자동
아차산에서 본 군자동 일대
 
세종대학교

군자동의 동명은 1914년 장내능동(場內陵洞)이라고 부르던 이곳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에 편입시키면서 군자리(君子里)로 하였다. 그런데 군자리의 동명은 백제때부터 있었다고 하나 믿기는 어렵고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 어느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동이로변(東二路邊-남일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그리하여 임금의 아들을 낳은 곳 이라하여 군자동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이곳을 명려궁터라 부른다.

군자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에 속하였으며 갑오개혁(1894)때 문서에 의하면 한성부(漢城府)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남서 두모방(南署 豆毛坊.城外) 절곶계(節串契)에 속하였다.그후 한일 합방으로 말미암아 서울 동명의 변천과 구역의 개편이 여러차례 있게 되었다. 따라서 1911년에 서울 도성 밖의 동을 8면으로 만들 때 이곳도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장내능동(場內陵洞)의 일부가 되었다.

그후 1941년 4월 1일 부군폐합(府郡廢合)때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 군자리가 된 것이다.

군자리가 다시 서울에 편입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의 구역확장에 따라 고양군 독도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성동구 군자리로 되었으며 군자동으로 개칭된 것은 1950년 3월 15일이었다.

▶ 노유동
의류할인매장이 밀집되어 있는 패션거리
 
일용직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알선하는 서울동부일일취업센터

동이로 동쪽에 위치한 노유동은 광진구가 분구되기 전에는 성동구 성수동 2가 지역이었다. 노유동의 발달기원이 되는 「노룬산」의 유래를 알아보면 뚝섬제방이 없을 때 이 일대가 야트막한 구릉인 잔디밭이었다. 그리하여 가을철이 되면 잔디가 누렇게 물들기 때문에 누런 잔디산이라 불렀고 그 명칭이 줄어 누런산이라 하다가 누룬산, 노룬산으로 변했다고 전해오며, 옛날에는 공동묘지(共同墓地)였던 곳이었으므로 잔무덤 이라고도 불려온다.

또한 노유동 뚝섬나루터 일대와 한강의 풍치를 즐기려는 풍류객들이 찾아와서 이곳이 늙어감을 서러워 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노유산(老遊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노룬산 부근은 한강이 범람하면 가장먼저 물이 들어오는 곳이라 하여 「작은 개무기바닥」이라고 일컬었다.

1955년 중구 양동 일대의 철거민 약 200세대를 이주시키고 시유지를 분양 함으로써 이곳에 주민들의 수효가 증가하게 되었다.

광복후 1949년 8월 15일 서울시 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독도출장소(纛島出張所)에서 행정을 담당하다가 1950년 3월 15일 성수동2가로 명명하였고 1995년 3월 1일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되면서 노유동으로 제정하였다.

▶ 능동
아차산에서 본 어린이 대공원
 
어린이 대공원 벚꽃놀이
 
알림의 종(1904) 마을의 위급시 타종하여 주민들에게 알리는 종

어린이 대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능동의 동명은 광무(光武) 8년(1904) 11월에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의 유릉(裕陵)을 모셨으므로 능(陵)말·능리(陵里)라 했고, 또 마장(馬場)의 안쪽에 있었으므로 장안말·안말 또는 한자명(漢字名)으로 장내리(場內里)·내리(內里)라 했다.

능동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의 일부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이후 한성부 5서(署)에 편입되어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城外) 전곶계(箭串契)능동이 되었다.

그리고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경성부(京城府) 두모면(豆毛面) 능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부군(府郡)의 통폐합(統廢合)으로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에 편입되어 능리가 되었다가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능리가 되었다. 1950년에는 서울시 조례 제 10조로 동리명칭 개정에 의해 능동으로 되었다.

▶ 모진동
건국대학교 일강호

모진동의 동명은 일제초인 1914년 장내능동(현 화양동)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에 편입시킬 때 모진동이라 처음 제정하였으며, 일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곶평(箭串坪)의 양마장(樣馬場)이 이근처에 있었는데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 근처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수렁위에 널빤지를 띄워 놓고 들어가 말을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한다.

이에 인근 주민들이 이 동네의 여인들을 보고 「모진여인」이라고 부르던 것이 「모진동네」로 바뀌었다고 안다

▶ 자양동
자양동 기사식당 골목
 
한강시민공원 뚝섬지부
 
한강의 풍광을 굽어보던 낙천정(서울시 지방 기념물 제12호)

자양동의 동명은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암말을 길러 자마장리(雌馬場里)로 호칭 되던 것이 일제 때 전음(轉音)되어 자양동(紫陽洞)으로 된 것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고양주면(古楊州面) 자마장리(雌馬場里)율동(栗洞)의 일부로 되었는데 자마장리와 율동(栗洞)일부를 통합해서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 자마장리가 되었다.

그후 자마장리는 자양리(紫陽里)로 고쳐졌으며 해방후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159호로 고양군 독도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에도 자양리의 명칭은 변함이 없었다.

1950년 3월15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 10호) 리가 동으로 고쳐짐에 따라 자양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옛날의 자양동 일대에는 채소나 곡식이 제일 잘 된 것을 대궐에 바치는 「농푸고지기」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상납을 하기 위해 곡식이 잘 된 곳에 청 보자기를 씌우면 주인도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으며, 비가 많이 와서 살곶이 다리가 물에 잠기게 되어 도강 할 때도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 중곡동
중곡시장
 
아차산 약수터
 
중곡동 뒤쪽의 아차산

중곡동(中谷洞)의 동명이 있게된 것은 이 동이 능동( 陵洞)과 면목동(面牧洞)의 가운데 있으므로 가운데말, 간뎃말, 또는 한자음(漢字音)으로 中谷里라 하였다.

중곡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고양주면(古楊州面)에 속했는데 갑오개혁(1894)때 문서를 보면 이때부터 한성부(漢城府)에 편입된 것으로 나타난다.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城外)전곶중계(箭串中契)·하계(下契) 면목리동(面牧里洞)에 속하였다.

일제 초까지 경성부(京城部) 두모면(豆毛面) 장내(場內) 중곡리(中谷里)라고 부르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 중곡리 (中谷里)로 되었다.

1936년의 경성부(京城府) 확장때에도 서울에 편입되지 못하였으나 1949년 8월 15일에 고양군 독도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성동구 중곡리로 되었다. 1950년 3월 15일 중곡리는 중곡동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중곡동의 현 행정구역은 4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에 따라 송정동(松亭洞),모진동(毛陣洞),화양동(華陽洞),군자동(君子洞),능동(陵洞)과 함께 장안동(長安洞)이 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어 중곡동이 되었다.

다시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979호에 의거 중곡 제 1 동과 제 2 동으로 분할되었다. 즉 중랑천(中浪川) 하류 이동 지역은 중곡 제 1동 구역이되고 아차산성(峨嵯山城) 동쪽 지역은 제 2동 구역이 되어 행정을 담당해 왔다. 그 뒤 주민의 증가로 분동(分洞)이 불가피 해져 1978년 10월 10일 중곡제 1동에서 제 3동이 나뉘어 3개 동사무소가 설치되고 1980년 7월 1일에 중곡 제2동에서 제 4동이 분동되어 현재 중곡 제 1동, 중곡 제 2동, 중곡 제 3동, 중곡 제 4동으로 되었다.

중곡동에는 사적은 거의 없으나 옛마을 이름으로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골」, 골짜기가 길므로 「긴골」또는 「진골」, 골짜기에 있는 「논장골」또는 「군정골」이란 명칭이 남아있다.

▶ 화양동
(화양동 110번지 일원) 세종임금의 별장 화양정이 있던 자리
 
건대역 온달거리(먹자골목)

화양동의 동명은 70년 전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또 일설에는 이곳을 회행리(回行里)라고 하였다. 즉 조선왕조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부인 송씨와 이별하면서 부인이 꼭 회행(回行)하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회행리(回行里)라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해 있었으며 갑오개혁때 문서에 의하면 한성부(漢城府)에 편입되어 남서 두모방(豆毛坊.城外) 전곶계(箭串契)에 속하였다.

그후 대한제국 때는 두모방(豆毛坊.城外) 전곶계(箭串契) 장내능동(場內陵洞)으로 칭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한성부(漢城府)를 경성부(京城府)로 고치고 1911년에 5부 8면제를 실시함으로써 도성 외의 각 동들은 8면으로 바뀌어 졌는데 이곳도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장내능동(場內陵洞)으로 개칭 되었다.

장내능동(場內陵洞)이란 동명을 풀이해 보면 어린이 대공원 자리는 유릉지(裕陵址)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의 비 순명왕후(純明皇后) 민(閔)씨의 능(陵)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이름도 능동,능리라 하였고 장내능동이란 말은 '마장(馬場)의 안쪽에 있던 능(陵)말'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곳 일대는 조선시대에 국마를 길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1914년 4월 1일 부군폐합(府郡廢合)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독도면에 이관되었다.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화양리가 되었으며 1950년3월 15일 화양동으로 고쳐졌다.

화양정(華陽亭)은 이동의 명칭이 된 정자이름으로써 건국대학교부속병원(민중병원) 서쪽언덕 화양동 110번지 32호에 있었으나 1911년 7월 21일 낙뢰로 내려앉아 그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정자가 세워진 때는 세종 14년(1432)인데 주서(周書)에 「歸馬于華山之陽」이란 말이 있으므로 이 뜻을 따서 화양정이라 하였다.

▶ 광장동
광장동 아파트단지
 
광장동 성황당

광장동의 동명은 원래 조선시대에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古楊州面)의 광진리(廣津里-일명 광나루)와 장의동(壯儀洞)이 통합되었으므로 광진리의 「廣」자와 장의동의 「壯」자를 따서 광장동이 된 것이다.

광장동에 있는 광나루는 강폭(江幅)이 넓은곳에 나루가 있다 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광장동 지역은 광진리 장의동외에 산의동(山宜洞)일부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에 속하여 광장리로 칭하였다.

그 후 광장리는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거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서울특별시는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고양군 독도면 전부를 서울시에 편입시키면서 독도출장소(纛島出張所)를 설치하였는데, 이에 따라 이동도 성동구 광진리라 칭하였다.

다시 1950년 3월15일 전년에 편입된 리를 모두 동으로 개칭하게 되면서 광진리는 광장동으로 고쳐져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