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에 나타난 광진지역(아차산 주변)의 중요성

 

(1) 삼국시대 전적지로의 광나루 지역

 

정선의 그림[광진]서울 지역의 전적지로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서울의 동쪽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삼국시대의 여러 성들이다. 오늘날의 광진구/강동구/송파구 및 경기도 하남시 지역에 한강을 끼고 산재해 있는 아차산성/풍납리토성/몽촌토성/남한산성/이성산성 등은 백제가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삼국간에 치열한 항쟁이 전개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원래 한강 유역은 인간이 모여 살기에 쾌적한 환경을 이루고 있어 신석기시대 이래로 주거지를 형성하여 오랜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고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한데다가 한강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중부지역 수로교통의 요지이고 특히 대중교류의 관문(관문(關門) 행성(行城)이나 장성(長城) 혹은 내지(內地)의 중요한 길목을 지키기 위한 성문. 임진왜란 이후 숙종 영조 때 많이 만들어졌으며, 조령관문(鳥嶺關門)이 대표적이다.)이었기 때문에 옛날부터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중요한 곳이다.

삼국시대에도 한강 유역을 점령한 나라는 패권을 잡게 되고 빼앗긴 나라는 쇠퇴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방어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오늘날 기록에 남아 전하는 것은 어느 성이 함락되었다든지 어느 장수가 전사했다는 정도의 극히 단편적인 사실밖에 없기 때문에 그 공방전이 어디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서울의 동쪽 평야지대는 백제가 초기국가를 형성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한 근거지였다. 백제는 중국 군현의 압력과 새로 발흥하는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여 책계왕(責稽王) 때에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방어선으로 구축하였다. 이때 광나루 지역은 아차산성을 비롯한 풍납리토성 등 여러 성을 연결하여 공격해 오는 침략군에 대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조에 '왕이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즙(修葺)하였다' 라는 기록과 이어서 '왕이 고구려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이에 대비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아차성은 오늘날의 사적 제234호인 아차산성(阿且山城, 峨嵯山城)으로 알려져 있다.

아차산성에 대한 구체적 조사보고는 《문화유적총람》(사적 제234호)에 실려 있다.
"주위가 약 1km, 높이가 10m 가량이며, 동·서·남측에 성문지(城門址)가 약간 남아 있는데 이 산성이 아차산성이다. 산성의 형식은 발권식(鉢卷式)에 속하지만 규모가 매우 커서 성내에 작은 계곡도 있다. 석벽의 광나루 표석구조는 삭토법(削土法)에 의해 형태를 축조한 후에 그 상변에 낮은 토루(土壘)를 구축하였던 것 같고 현재는 석괴들이 무너져서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외형을 이루고 있다."고 기록된 보고로 보아 백제의 한성시대의 주성(主城)으로서 대안(對岸)의 풍납리토성과 함께 요충을 이루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차산성이 주성이었음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아차산 정상에 두 개의 성지가 있었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산성 주변에는 여러 토루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토루들은 아차산의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뻗어 망우동에 이르는 장성들과 연결된다. 소보(小堡)나 소루(小壘)의 흔적은 구리시 아천동 쪽으로 뻗은 여러 작은 산줄기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아차산성을 주성으로 하고 그밖에 성벽을 길게 쌓아 방위벽을 형성하고 다시 장성에서 산줄기마다 전진 초소격인 소보를 배치하여 튼튼한 강북의 방술(防戌)체제를 형성했던 것이 확실하다.

 

(2) 교통의 요충지

 

광진의 옛전경현재의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도선장으로 광나루, 너븐나루, 광장진 등으로 불리었다. 이 곳은 한강 이북과 이남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의 하나로서 일찍이 상고시대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신석기시대에는 북쪽에서 이주해 온 민족의 일부가 지금의 강동구 암사동 강변 일대에 수혈주거(竪穴住居) 시설을 마련하고 있으니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이 곳을 건너서 오갔다.

한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문화가 집산 되면서 광진을 오가는 행인들도 빈번하여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태종 14년(1414) 좌도수참전운별감으로 하여금 광진별감을 겸하게 하여 진도의 관리와 아울러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자, 또는 변란을 도모하는 자 등의 출입을 감시케 하였다. 이어서 책임 관리자인 별감(別監)을 도승(渡丞)으로 개칭하고 광진에 상주시키니 도승은 종9품의 하급 관원이었다. 광진은 당시로서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연결 지점일 뿐 아니라 평소에도 강폭이 넓고 물이 많아 그 관리에 자못 유의하였다. 게다가 광진은 좌도의 수참을 관리하는 곳이어서 광진도승의 업무는 번잡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 삼전도(三田渡)가 개설됨을 계기로 세조 때에는 광진의 조운과 진도 관리를 분리하여 삼전도승으로 하여금 광진의 관리를 맡게 하였다.  삼전도의 개설로 광진의 기능은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일반인의 왕래는 계속되었다. 명종 때는 지금의 천호동 부근에서 약수가 샘솟아 효험이 있다고 전해지면서 성내 사대부 부녀자들의 가마가 나루터에 붐볐다고 한다.

광진에는 4척의 진선(津船)과 그에 따르는 진부(津夫)가 배속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소정의 위전(位田)이 지급되고 있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정치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들이 토지를 탈취하고 나룻배를 강점함으로써 나루는 부실해져 갔다. 그나마 일제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1936년 이 곳에 너비 9.4m, 길이 1,037m의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는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 후 이 곳에 유원지가 조성되면서 나루터에는 나룻배 대신에 보트와 유람선이 물결을 가르며 관광객을 불러모았었는데 유원지마저 폐쇄되면서 오늘에는 서너 척의 낚싯배만이 쓸쓸히 나루의 옛 모습을 그리고 있다.

2. 아차산성의 유래

(1) 서울 600년사에 나타난 아차산성

 

아차산성 서북외벽광진구의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일명 아차산성(阿嵯山城) 또는 아차산성(峨嵯山城), 아차성(阿且城)이라고 불리며, 최초의 조사시에는 고산성(古山城), 광진고산성 또는 광진성이라고도 불리던 고성이다.

이 성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울 주변 백제 고성으로서는 가장 뚜렷하게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서 역사적 기록과도 부합되는 옛 성터이다. 이 성지(城址)는 국립건설연구소에서 발행(1970)된 5만분의 1 지도상에서는 장한 성(長漢城)으로도 표시되고 있다.

이 성지는 이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 "양진고성(楊津古城,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는 광진성이라 기록됨)은 남쪽 아차산의 동쪽 언덕에 있는데 토축으로 한강과 광주 평고성을 내려다볼 수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삼국시대 방수처가 되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은 아차산의 지봉인 광나루 북방 약 100m 높이의 구릉 동남면에 설치되어 있는데, 현재는 워커힐호텔 후면 산 능선 가까운 경사지에 이 광진고성이라고도 불리는 아차산성이 있다.

이 고성에 대한 다른 기록은 《조선고적조사보고》(1916)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지는 평평한 구릉의 정상으로부터 중복(中腹)에 거치는 곳까지 이 구릉의 1면의 상반부를 거의 방형(方形)에 가깝게 에워싸고 있다. 그 토루는 비교적 완전히 남아 있으며, 바깥쪽이 내복(內服)보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것은 후대의 뚝도 목마장의 군마(軍馬)의 사육에 이용할 때에 수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이 산성 밖에도 아차산 정상에 성지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이것을 보지는 못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고적조사보고》(1917)에는

"광진산성은 고양군 뚝도면 광장리라고 하는 광진에 있다. 아차산의 일단(一端) 한강에 임한 장소에 구축된 성지로서 백제시대 유적으로 보인다." 라는 간단한 조사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이성에 관한 조사 보고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서는 고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주군 구리면 아천리에 걸쳐서 주위 약 580칸, 외사면의 높이 약 8칸의 석성이다. 그리고 양주군 좌미천 국유림 표식 제2호로부터 산등성이에 따라 동 7호 부근까지 토축의 통로가 있다. 동남 방면에 누벽을 뚫고 통로가 있다. 성내에 초석과 고와(古瓦)가 산재하고 있다. 아차산성 또는 아차성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1945년 이전의 기록 외에도 이 성에 대해서 《향토서울》 제1호에서 장도빈(張道斌)의 〈전도(奠都) 이전의 서울지방〉이라는 논문에서 아차성(阿且城) 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밝히고 있다.

그 후 이 산성은 1973년 5월 25일에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이 산성에 대한 내용을 《문화유적총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강 광장진 배후에 부등변 방형(方形)으로 주위가 약 1km, 높이 10m 가량이며, 동서 남측에 약간의 성문지(城門址)가 남아 있는데, 이 산성이 아차산성이다. 산성의 형식은 발권식(鉢卷式)에 속하지만 규모가 매우 커서 성내에 작은 계곡도 있다. 석벽의 구조는 삭토법(削土法)에 의해 형태를 축조한 후에 그 상변에 낮은 토루(土壘)를 구축하였던 것 같고, 현재는 석괴(石塊)들이 무너져서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외형을 이루고 있다. 백제 초기 국도(國都)인 한산(漢山)시대에는 이 산성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안(對岸)에 풍납리 토성과 함께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을 것인데, 《삼국사기》에 기록되기로는 백제의 개로왕이 이 성하(城下)에서 고구려군에 피살되었고, 또 고구려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 여기서 전사한 사실도 전해져 온다. 아차산성(阿嵯山城),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 등의 이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산성은 아차산 주변에서 발견되는 장성(長城) 벽과 중랑천을 굽어보는 낮은 구릉상에 설치된 여러 토성과 연관되는 성지로서 백제의 방어성을 이루고 있는 여러 고성의 중추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2000년 현재 아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산성을 처음 축성한 나라가 어디이고, 언제인지에 대한 학계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 아차성의 명칭에 대한 새로운 견해

 

아차산성 안내도아차성(阿且城)이 처음 문헌에 나타난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기 책계왕(責稽王) 즉위 원년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을 수리하고 蛇城(사성)을 정비하였다는 기사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차성은 A.D. 286년 이전부터 있어 왔던 백제의 산성인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고구려 長壽王(장수왕)의 한성백제의 정벌은 아차성을 북성으로 간주하여 7일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한 한강 남의 한성을 핍박하여 도망가는 백제의 蓋鹵王(개로왕)을 한강 북의 북성인 아차성으로 호송·참살한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아且(차)성/아旦(단)성의 표기상의 불일치는 삼국사의 정립에 적지 않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삼국사기』에 있어서도 아且(차)성은 개로왕 條(조)에, 아旦(단)성은 책계왕 조에 나타나고 있으며 地理四 三國)有名未詳地分((지리사 삼국유명미상지분)에서도 아旦(단)성이 보이고 있다. 또한 廣開土大王陵碑文(광개토대왕능비문) 面에서 백제에서 공취한 58성중에 아旦(단)성이 명확히 암각되어 있다. 溫達傳(온달전)에서는 「且(차)」와 「旦(단)」의 판독이 어렵다고 하겠다. 근조선 때에 편찬된 『輿地圖書』(여지도서)에서는 단양군 영춘면에 소재한 溫達山城(온달산성)을 죽령 以西의 고구려의 옛 땅을 찾기 위하여 출정한 온달이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곳으로 비정하였다. 단양군 영춘면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에서 「乙阿且縣(을아차현)」·「乙阿旦縣(을아단현)」으로 혼용하여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판각상의 문제에 대하여 斗溪(두계) 선생은 한강하류에는 아旦(단)성이 있었고 남한강 상류에는 '웃(上)'의 뜻인 '乙'을 머리글로 하는 乙阿旦(단)城이 있었다고 하여 삼국시대 阿且(차)城은 판각상의 오류로 규정하였다. 다만 한강하류에 소재한 阿且(차)城은 원래 阿旦(단)城이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후명인 「旦(단)」에 저촉되므로 이를 고쳐 阿且(차)城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래의 李道學(이도학)은 「여지도서」에서 乙阿旦(단)縣이 태조의 避諱(피휘)에 관계되어 乙阿朝縣으로 바뀐 사실을 단서로 아단성이 아차성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단정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남한강 상류 단양군 영춘면에는 을아단성이 있었고 한강상류 峨嵯山(아차산)에는 아단성이 있었던 것으로 통념되어 왔다. 아단성의 「阿」는 광개토대왕능비문면에 나타나는 阿利水의 「阿」에서 원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紳功紀(일본서기 신공기)에서 신라의 도성을 흐르는 강의 이름을 「阿利那禮河」(아리나예하)라고 명기하고 있어서 아리수가 한강에서만 한정된 고유명사인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한강하류에 소재한 아차산의 명칭은 『世宗實錄』·『大東地志』(세종실록 대동지지)에서 보이고 있고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에서 현재의 위치에 있음을 정확히 하고 있다. 또한 한강 남의 백제의 한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강의 渡河點(도하점)을 방어하는 한강 북의 관방체계는 아단성말고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음으로 아단성이 한강하류 아차산에 있는 사적 제234호 아차성인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且(차)」와 「旦(단)」의 표기상의 불일치를 논외로 하고 아차성이 「阿且(아차)」가 「峨嵯(아차)」로 표기가 변한 사실은 명확하다. 그러나 阿且山 또는 峨嵯山과 同音異寫(동음이사)한 지명은 충청남도 홍성군에 소재한 「峨嵯山」의 지명이 있고, 전라남도 나주군의 옛 이름인 「阿次山郡」(아차산군)이 『삼국사기』지리지에 보이고 있어서 阿且山(峨嵯山) 또는 일정한 지역만을 지칭하는 명칭인가는 숙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한강의 異名으로 郁利河(욱리하)가 있다. 郁利河의 「郁」은 음독하면 '욱'이다. 阿利水의 「아」를 음독하면 '옥'이다. 「郁」과 「阿」는 音似(음사-같은 음)로써 연결되고 있다. 阿利水를 '옥리수'로 부를 수 있는 여지가 엿보인다. 沃沮城(옥저성)에 玄 郡治(현토군치)가 있었다. 달리 東沃沮(동옥저)도 있었다. 옥저성의 「沃」은 아차성의 「阿」와 '옥'의 공동음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沮」와 「且」의 공동음도 '저'이다. 아차성을 '옥저성'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아차성을 沃沮城(옥저성)이라고 하지 않고 峨嵯城(山)으로 변이 되었을까. 중국사서에 보면 조선 사람들은 「我」를 「阿」라고 한다고 하여 「阿殘」(아잔)으로 卑稱(비칭)하였다. 근조선 사회는 유교사상이 심화되어 있었다. 「아잔」의 비칭을 꺼리어 「我」로 바꾼 것이다. 중국사서는 「阿」와 「我」가 뜻으로 같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국어음으로 같은 것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 또한 山의 개념을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山」변을 첨가 「峨」라고 하였다. 그리고 且(차)와 旦(단)의 판각상의 혼돈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山(산)」변을 첨가할 수 있는 「嵯」를 「且(차)」대신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아차성은 옥저성과 같은 보통명사이며, 峨嵯城(山)은 잘못 전의된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맞는다면 아단성은 '옥단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실 백제의 성곽은 20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백제의 성곽은 한강·금강·영산강 유역을 기반으로 하여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한강유역에서 중간지역을 제외한 相距(상거)한 거리의 상류와 하류인 충북 단양군 소재 웃(乙)阿旦(단)城과 서울 광진구 소재 阿旦(단)城 두 곳만을 지정하였다는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阿且(차)城의 바른 음독은 '옥저성'이며, 阿旦(단)城은 '옥단성'으로 불러져야 한다.

  

 

3. 아차산에 전해오는 이야기들

 

(1) 홍계관과 아차산

 

광진구에는 아차산이란 산이 있다. 이 산은 조선시대 명종대왕때 붙여졌다 전하는데 그 유래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있다. 명종때 홍계관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점을 잘 쳐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져갔다.

그러더니 명종의 귀에도 그의 이름이 들려졌다. 명종은 그 홍계관이란 자를 궁으로 불러 들였다.

나라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홍계관은 매우 기뻐하며 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그대가 그리 점을 잘 치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명종은 준비한 궤짝을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맞춰 보거라. 맞추면 너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고 틀리면 네 목을 자를 것이니라."

홍계관은 말없이 궤짝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쥐가 들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용하구나. 그러면 몇 마리가 있느냐?"

질문을 받은 홍계관은 또 궤짝을 쳐다보았다.

"세 마리이옵니다."

"허허, 그럼 그렇지 궤짝을 열어 보거라!"

궤짝을 열자 두 마리의 쥐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럴리가!"

놀란 홍계관은 꼼짝없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허나 그는 죽는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의 점이 틀린 것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가 사형장로 끌려 갈 때였다.

명종은 가만히 있다가 외쳤다.

"아차!"

"여봐라! 쥐 두마리 중 암놈의 배를 갈라 보아라."

신하들이 분부대로 배를 갈랐는데 그 안에는 새끼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이런, 죄 없는 자를 죽이려 했다니...... 여봐라 어서가 사형 집행을 멈추게 하여 그를 이리 데려 오너라."

같은 시간 홍계관은 죽기 직전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점을 쳤다. 그러자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는 칼을 든 집행관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청을 하였다. 죽기 전의 청이라 집행관도 들어주었다.

"어명이다! 기다려라~!"

말을 타고 달려오는 한 사람이 외쳤다.

그 소리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아 집행관은 집행을 늦추고 있어 고함을 치는 줄 느낀 나머지 그만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이 아차산이라 불려졌다 한다.

 

(2))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

 광이와 진이

아차산에는 고구려 온달(溫達)장군과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平岡公主)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온달은 용모가 못생기고 순박하여 고구려 당시에는 "온달 바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평강공주와 결혼한 뒤 무예를 수련하여 용맹한 장군으로 발탁되어 만주 요동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고 그 후 신라에게 상실한 죽령 이북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출전하였다. 그가 신라군과 전투 중에 전사한 곳이 아차산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온달장군은 아차산 전투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고 하며 시신을 넣은 관을 평양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평강공주가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전선으로 달려와 운구를 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관을 향하여

"死生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돌아갑시다."

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땅에서 떨어지면서 운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공주가 온달이 전사한 후 상심한 나머지 평양에 가지 못하고 따라서 죽었다고도 한다. 

 

4. 아차산에서 발굴된 문화 유적


(1) 아차산성 발굴의 역사


◈ 문헌에 나타난 아차산 역사


    ▷ 「삼국사기」백제본기 책계왕 즉위년조(A.D. 286년)
          '고구려의 침입을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을 수리하였고, 축성을 쌓았다'
    ▷ 「광개토대왕비문」(영락 6년 A.D. 396년)
          백제에서 공취한 58성중에 아단성(阿旦城)이 암각되어 있음
    ▷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21년 (A.D.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북성을 7일만에 빼앗고, 남성을 공격하여 성문에 불을

          놓자, 왕이 달아났다. 이에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개로왕을 잡아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헤아린

          다음 아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

 

◈ 아차산성의 조사 발굴일지성내부 건물지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에 편입
    ▷ 1962년 워커힐호텔 건립으로 호텔부지에 포함
    ▷ 1963년 1월 아차산 서쪽지역(아차산성 포함)이 서울 성동구 편입
    ▷ 1973년 5월 25일 아차산성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234호 지정
    ▷ 1994년 구리시에서 아차산에 대한 종합학술조사 일환으로

                  아차산성에 대한 문헌조사 및 지표조사 실시,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발행

    ▷ 1995년 3월 성동구의 분구로 아차산성 광진구 편입
    ▷ 1995년 9월 광진구 아차산성 복원사업 검토 및 계획서 작성
    ▷ 1996년 12월 12일부터 30일 아차산성 보수공사 시행
                   - 보수공사업체 : (주)신일건설
                   - 겨울철 문화재관리지침에 따라 보수공사 중지
    ▷ 1997년 3월 아차산성 기초조사(트랜치 작업 3개소)
    ▷ 1997년 6월 7일 96년 보수구간에 대한 성곽 실측 및 학술적 규명에 대한 필요제기로 보수공사 중지
    ▷ 1997년 9월∼ 98년 1월 21일 '96보수구간 실측조사 및 수습발굴
                   - 실측기관 :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 발굴기관 : 국립문화재 연구소
    ▷ 1998년 4월 22일 아차산성 기초학술조사 용역 보고서 발간
    ▷ 1998년 12월 24일∼1999년 5월 12일 아차산성 정밀학술조사 

                   - 학술조사 : 서울대학교, 건국대학교, 명지대학교, 세종대학교
    ▷ 1999년 9월부터 아차산성 성곽보수계획 논의중

 

(2) 기초 및 정밀 학술조사에서 나타난 유물들
            연화문와당   
    - 사진은 '아차산성 발굴조사보고'에서(1999. 5)

 

▷ 기와류 : 대부분 평와류와 연화문이 시문된 숫기와 와당이 발견되고

           소량의 명문와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北』,『漢』등의

           글자가 찍혀있다.

 

▷ 토기류 :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주름무늬병, 단각고베와

           각종 뚜껑류가 나타났다.

 

▷ 기  타 : 흙으로 만든 사람모양의 인물상 1점과 화살촉을 비롯한 무리

           종류와 쇠스랑 등의 체기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5. 아차산 두배로 즐기기 -  아차산 문화유적 답사코스

 

※  이 자료는 광진시민모임에서 진행한 "청소년을 위한 아차산 역사기행"을 참고로 제작하였습니다.
 

답사코스 : 영화사(미륵전, 사찰) - 아차산성(서쪽외벽) - 돌널덧무덤 - 대성암(범굴사 불량권) - 온달바위 -

               아차산바위산고분 - 아차산중턱(보루산관찰) - 제4보루성 - 하산

 


아차산성아차산 일대의 고대 군사시설 유적 ㅣ  아차산 일대의 옛 무덤들 ㅣ  살꽂이 목장 돌담장 유적

선사시대의 유적  ㅣ 아차산 봉수대 유적  ㅣ   아차산의 기타 유적들


 

 광진 지역의 문화유적을 가장 풍부히 담고 있는 곳은 아차산 일대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차산 일대와 광진 지역은 선사시대로부터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특히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여러 차례 싸움을 벌였던 곳으로 이에 관련된 군사 유적이 남아 있다. 이에 먼저 아차산 일대의 문화유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아차산 줄기는 광진구 뿐만 아니라 동으로는 경기도 구리시, 북으로는 중랑구 면목동·망우동 일대에 걸쳐 있고, 심지어 중랑구 신내동의 봉화산도 예전에는 아차산 줄기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두 아차산으로 불려지곤 하였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아차산의 문화유적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구리시·중랑구에 속한 지역도 포함시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1) 아차산성 (유적번호 1)

아차산성 전경 아차산 줄기를 광진구에서 바라볼 때 맨 오른쪽, 곧 광나루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으로 광진구 광장동에 속한다. 백제가 처음 쌓아 수도인 한성(하남 우례성)을 방어하던 성으로 추정된다. 아단성·아차성·장한성·광장성·양진성등으로 불려 지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장한성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아차산성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산 꼭대기 둘레를 성벽으로 둘러쌓는 테뫼식이지만, 능선 아랫쪽 계곡 일부를 성 안에 포함시키게 만듦으로써 성 안에 우물이 있고 작은 개울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깝도록 하였다. 돌로 된 성벽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흙으로 뒤덮여 전에는 이 산성이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완전한 석성이다. 이 산성은 동서남북의 성벽이 잘 살아 있고, 이외에도 성문이 있던 자리, 망대가 있던 자리, 성 안의 여러 건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던 자리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많은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이 발견된다.

아차산성은 1962년 워커힐 호텔이 건립되면서 워커힐 호텔의 경내에 포함되었으며, 1973년에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에 구리시 문화원에 의해 종합적인 학술조사(지표조사)가 실시되어 많은 사실이 밝혀졌고, 1997년에는 명지대학교 발굴조사단에 의해 서쪽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10여m 높이의 돌로 쌓은 성벽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확인된 성곽은 기대 이상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이것을 토대로 현재 60여m 구간의 성곽을 보수해 놓았다. 연차적으로 산성 전체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져 옛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고, 없어진 시설들을 복원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문화유적 및 역사적 자료가 될 것이다.

(2) 아차산 일대의 고대 군사시설 유적(유적번호 2∼13)

보루성 발굴광경아차산 일대에는 아차산성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산 봉우리나 능선을 따라 가며 일종의 보루성의 흔적으로 보여지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대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했을 때 쌓은 것들로 추정되지만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다.

1997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개의 보루성 유적이 발굴되어(유적번호 8: 헬기장이 있는 곳) 일단 고구려 유적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보루성은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 49-4번지로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아차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로, 서북 방향으로는 용마봉과 연결되는 지점에 해당된다. 이 유적은 남북으로 긴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고 양쪽 끝은 두 개의 작은 봉우리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길다란 타원형 지형의 둘레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경사면을 따라3∼6단의 석축을 둘러쌓아서 보호하였으며, 유적은 건물터의 온돌 구조6개, 작은 연못 구조 2개, 유적 전체 둘레의 석축 등이 발굴되었다.

  유물은, 토기로는 단지·항아리·사발·시루·그릇 뚜껑·잔·접시 등 100여점이 출토 되었는데, 모두 고구려 토기의 대표적인 것들로 되어있다. 철기로는 30여점의 철제 도끼를 비롯하여 철못·끌·낫·호미 등 공구류화 철 화살촉·창·창 고다리·갈고리 창 등 무기류 등 모두 100여점이 출토되었다. 이것들도 모두 고구려의 유물로 추정된다. 앞으로 자세한 발굴 보고서가 출간되면 이 지역에서의 고구려 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아차산 일대의 이들 고대 군사 유적들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와 연구가 실시되어 유적의 성격이 분명하게 확인된다면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은 물론 역사 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차산 일대의 옛 무덤들 (유적번호 14∼21)

아차산 바위산고분고분(古墳)은 아차산 일대에 150기가 넘는 숫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고분은 이미 파괴되거나 도굴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이 많고 일부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고분은 주로 능선을 따라 가면서 있느데, 고분의 형태는 대체로 수혈식 석곽(위에서 시신을 넣도록 돌로 만든 곽)이나 석실분(돌로 방처럼 만들고 관을 넣도록 한 무덤)으로 규모는 대략 길이 2.4 m, 폭 1.5 m, 깊이 1.1 m 정도이며, 방향은 남북으로 놓여 있는 것이 많다.

이 가운데 고분의 모습이 가장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은 아차산의 구리시 쪽 우미내 계곡 서편의 바위산 중간 해발 125 m 지점에 있는 횡혈식 석곽분(시신을 옆에서 넣도록 돌로 곽을 만든 무덤)이다.(유적번호 16) 크고 편편한 바위산 위에 석곽을 만들었는데, 석곽은 좌우 긴 면에 각각 2개의 판석과. 뒤의 짧은 면에 1개의 판석을 세웠고, 천장은 2개의 판석으로 덮었다. 석곽의 남쪽 벽이 입구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남쪽 입구는 터져 있고, 입구를 막았던 것으로 보이는 판석이 고분 옆에 놓여 있다.

석곽 안의 크기는 길이 240cm, 폭 80cm, 높이 약90cm 이다. 방향은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처음에 석곽을 흙으로 덮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모든 흙이 없어졌다. 이처럼 능선의 꼭대기에 가까운 곳에 바위를 바닥으로 무덤을 만든 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인데, 이 고분 안이나 주위에서 발견된 유물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고분의 연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아차산 일대의 다른 고분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문헌에 의하면 아차산 일대에는 중곡동에만 하여도 수백 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하나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이 없어 그 시대나 성격을 알 수는 없지만, 이들 고분 주위에서 채집한 토기 조각들을 보면 고려시대 이전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의 것들도 있어 이 지역에 사람이 매우 오래 전부터 살았음을 알게 해준다.  

(4) 살꽂이 목장 돌담장 유적 (유적번호 22)

살꽂이목장을 그린 진헌마정색도아차산 일대에는 능선을 따라가며 조선시대 살꽂이 목장의 돌담장의 흔적으로 보이는 석축이 연이어 발견된다. 중곡4동 아차산 밑에 있는 기원정사 뒷편에서 시작하여 아차산 주 능선을 따라 헬기장 있는 곳을 지나 용마봉으로 이어지는 긴고랑 윗 능선으로 해서 용마봉, 다시 망우리 쪽으로 능선을 따라 가며 여러 부분에서 발견되는 길이 약 10Km에 달하는 유적이다. 이러한 유적은 동대문구 답십리동·장안동에 있는 매봉산 줄기 능선에서도 일부 발견되고 있어 살꽂이 목장의 담장임이 확실하다. 많은 부분이 돌로 된 유적이나 곳에 따라서는 흙으로 쌓은 유적도 있다.

살꽂이 목장은 지금의 광진구 서쪽 대부분의 지역과, 성동구 성수동·송정동·사근동 일대, 동대문구 장안동 일대, 중랑구 면목동 일대를 포함하는 매우 넓은 지역으로 중랑천 좌우 일대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목장의 둘레는 처음에 나무로 울타리를 쳤으나 자주 손상되자. 아차산 능선과 작은 언덕들의 능선에는 돌담을 쌓았고, 평지에는 나무 울타리를 만들었으며, 특히 일대에는 버드나무를 줄지어 심어 울타리 역할과 함께 한강의 바람을 막는 역할도 하게 하였다.

이 아차산 능선의 석축들이 살꽂이 목장의 담장인 것은 틀림 없으나, 고대로부터 있던 장성(고구려의 장성이거나 신라의 장한산성)의 무너진 것들을 이용해 다시 쌓아 목장의 담으로 사용한 것인지, 전혀 새로 쌓은 목장 담의 유적인지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아차산 줄기의 여러 봉우리나 능선에서 확인되는 보루성 유적은 고구려 등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5) 선사시대의 유적 (유적번호 23∼26)

아차산 일대에서는 몇 개의 선사시대 유적도 확인되었다. 중랑구 면목동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이 발견된 곳은 아차산 서쪽 경사진 아래로 그 앞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중랑천이 흐르고 있어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살기에 매우 적합한 곳으로 보인다. 1967년에 면목지구 주택지 건립을 위한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으나 정식 발굴을 하지 못하고 유적은 파괴되었으며, 300여 점의 석기류만 수습하였다.

구리시 교문동에서는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1932년과 1934년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수습된 유물은 남아 있지만, 유적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여러 종류의 청동기 시대 토기와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구리시 인창동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도 일제 시대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유물만 남아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가 없다. 이곳에서도 청동기 시대 여러 종류의 토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 또,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 교문동의 경계 지점에서도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1965년에 발굴되어 청동기 시대의 석기와 터기 조각등 500 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그 정확한 위치는 역시 확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아차산 일대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여러 곳 발견되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6) 아차산 봉수대 유적 (유적번호 27, 28)

남산에 복원된 봉수대아차산 일대는 부근에 다른 큰 산이 없어 동쪽으로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일대와, 남쪽으로 서울 강남 일대는 물론 경기도 하남시와 성남시 분당구 까지, 서쪽으로는 남산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 북쪽으로는 멀리 도봉산, 수락산 까지 한눈에 바라보이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다. 때문에 고대로부터 비상용 통신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던 봉수대 (봉화를 올리던 시설이 있는 곳)를 설치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봉수대란 옛날 나라의 중요한 통신 시설로서, 국경 지대 등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이나 다른 국경 지대 등에 알리는 동시에 그 지역 백성에게도 알려서 위급한 상황에 신속히 대처하게 하기 위하여 주로 사방의 관찰, 감시가 용이하면서도 지나치게 높거나 험하지 않은 작은 산 꼭대기에 설치하여 운영하던 것이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고려시대부터 이며, 조선시대에는 아주 체계적으로 활용되었다. 봉수대는 대략 수십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하여 밤이면 횃불로서, 낮이면 연기로, 비가 오거나 안개·구름이 덮였을 때는 봉수대의 군인이 직접 다음 봉수대로 달려가서 상황을 전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서울(한양) 남산에는 5개의 봉수대가 있어서 전국 각지로부터 올라오는 봉수대 연락 정보를 종합한 후 이를 병조(지금의 국방부)에 보고 하였다. 그리고 서울(한양) 부근에는 남산 봉수대로 직접 연결되는 최종 봉수대로 안산(서대문구 무악재)에 2개, 청계산(경기도 성남시)·개화산(양천구)·아차산(광진구)에 각 1개씩 운영되었는데, 아차산 봉수대는 함길도와 강원도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차산 봉수대의 위치는 현재 옛 문헌 자료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아차산 본 줄기에서 조금 북쪽으로 떨어진 중랑구 봉화산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유적번호 27) 조선시대에 아차산은 지금의 봉화산 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봉화산은 비록 남산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지만 그 사이에 별다른 산이 없어 남산에서 잘 바라다 보인다. 이처럼 아차산 봉수대를 봉화산으로 추정하는 견해에 따라 얼마 전 서울시에서는 남산 봉수대, 무악 봉수대, 봉화산 봉수대 등을 복원하여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 역사 교육의 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나, 용마봉 주위 아차산 줄기에는 봉수대로서의 위치 조건에 알맞은 곳이 여러 곳 있기 때문에 봉화산 봉수대와는 별도의 아차산 봉수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워커힐 호텔 경내의 아차산성 북쪽 성벽 정상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그 외에 용마봉 서쪽 능선에 있는 돌 무더기가 봉수대의 흔적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나 분명치 않다.(유적번호 28) 한편, 오늘날 아차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인 용마봉 정상에는 이곳의 해발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설치되어 있어 봉수대와는 다른,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7) 아차산의 기타 유적들

아차산 일대에는 그밖에 옛 절터 세 곳과 대성암이라는 사찰 1곳, 무너진 석탑 1곳, 승려들의 화장(火葬)터(다비터) 1곳, 조선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무덤 등이 있다.(유적번호 29∼35) 옛 절터는 아차산 헬기장에서 구리시 쪽 계곡으로 얼마간 내려 간 곳과, 대성암 동북쪽 250m 되는 곳, 그리고 구리시 백교마을에서 망우리 공원묘지로 오르는 능선에 있는데, 대개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주초석 등이나 석탑의 무너진 돌 들이 발견된다.

대성암은 구리시 쪽 아차산 중턱에 있는데, 신라 진덕왕 원년(64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처음 이름은 범굴사라 하였다. 그후 고려 우왕 원년(1375)에 나옹 스님이 중창(다시 세움)하여 대성암이라 하였으나 그 이후 폐허가 되었고, 조선 영조 26년(1750)에 작은 절로 다시 세워졌으나 고종 19년(1882)에 불탔고, 1912년에 다시 세워져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하거나 증축하여 오늘에 으른다. 아차산 일대에는 옛날 10여 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 오래 된 절로는 영화사, 대성암 등이 남아 있고, 근래에 세워진 절이 몇 개 더 있다.

대성암에서 구리시 쪽 계곡으로 한참 내려가면 요즘 사람들이 온달샘이라 이름 붙인 샘물이 있고, 이곳에 무너진 탑의 돌들이 있었다. 현재는 남아 있는 석탑돌 들로만 임시로 쌓아 놓았다. 석탑은 현재 기단부화 탑신부 각 1개씩과, 옥개석 1개만 남아있어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다. 연대는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승려들의 화장터인 다비터는 대성암에서 구리시 아천동으로 내려가는 골짜기에 있다. 약 40평 정도의 평탄한 곳에 약 50cm 정도 높이로 쌓은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한 쪽 부분에 건물의 기단(基壇) 시설이 있고, 주변에서 도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작은 절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리시 아천동 산 14번지 아차산 아래에 있는 명빈묘는 조선 제3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묘이다. 명빈 김씨는 김구덕의 딸로 태어나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