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차산에서의 주요 古代史의 簡考 |
|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의 아차산 이야기 |
|
향토사학자 김민수 |
|
ㅣ 기사입력 |
2006/12/11 [19:17] |
|
아차산에서의 주요 古代史의 簡考 향토사학자 김민수 들어가는 말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보루들이 한강하류 유역 아차산 일대에서만 밀집되어 나타나는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일까. 이러한 자료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활용방안들도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하여 중국은 왜 고구려를 자기네의 지방정권으로 끌어들이는 역사 왜곡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정치적 속셈을 파악하고자 한다. 저잣거리의 바보 온달과 구중 궁궐의 공주 평강의 만남부터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온달의 입신양명과 평강공주 애틋한 사랑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 서울 소재 사적 아차산성인지, 그렇지 않다면 충청북도 단양 온달산성인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논쟁거리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검토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한다. 여기에 온달傳의 배경과 그 목적한 바를 맞추면 역사의 실체가 뚜렷하여 질 것이다. 사적 아차산성은 시굴발굴 결과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신라의 유물만이 출토되었다. 성벽 또한 보축 방법에서 부채꼴 모양의 뒤물려쌓기의 수법을 사용한 전형적인 신라의 산성이다. 성 안에서 출토된 기와 조각에서 北․漢․山이라고 하는 글자가 씌여진 것들이 여럿 발견되었다.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A.D. 668년 20만 대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정벌한 전초기지였다. 그렇다면 그 이전 A.D. 660년에 있었던 백제정벌에서 신라군 역시 이곳 아차산성 지경에서 水軍으로 한강하구를 빠져 나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신라의 陸軍과 唐나라의 水軍이 서해안의 금강하구의 기벌포에서 만나기로 한 보름 여의 촉박한 기일을 맞추는 데에서부터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군도 唐나라와 마찬가지로 水軍작전일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러할 경우 신라의 水軍은 한강하류의 위쪽 아차산성 지경에서 함선을 타고 한강하구를 빠져 나가야 한다. 이러한 신라의 水軍을 한강하구의 강변에서 백제군이 막았을 정황들을 설명하겠다. 1. 아차산 보루群
한강하류 유역에서도 위쪽에 있는 東部지역은 선사시대 이래로 古代史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적의 보고이다. 암사동을 비롯한 미사리 선사유적지가 있고, 풍납토성·몽촌토성·이성산성·아차산성 등 삼국의 주요 거점城들이 포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방이동·석촌동 고분군들이 정비되어 있다. 대체로 이러한 유적들은 아차산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강의 남쪽에 있다. 한강의 北岸에는 유일하게 사적 234호인 아차산성만이 홀로 한강하류의 목을 지키기 위한 파수꾼을 자처하여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한강하류 위쪽의 북쪽에 고대사의 유적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강하류 위쪽의 북쪽에 있는 고대사의 유적을 처음 언급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간략히 조사한 유적들을 정리하여 『조선보물고적조사보고(1916~1942)』라는 자료집들을 발간하였다. 여기에 기재된 아차산 일대의 유적들은 그 기슭인 광진구 내의 주거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왔다. 따라서 모두 없어진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1977년 광진구 화양지구 택지개발 사업으로 인하여 마지막 조사된 구의동 유적지까지도 백제시대의 고분으로 판정하였고 이 또한 택지지구에 수용되어 없애버린 것이다. (1)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의 조사 경위 필자는 1989년 늦여름 아차산에서 산불이 났을 때에 진화작업을 하던 중 15개의 보루성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석성의 흔적들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것이 해방 후 처음으로 아차산 일대의 관방시설들을 보고한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김민수,1990)』라는 자료집이다. 이 자료들은 대체로 없어져 버린 것으로 여겨 왔던 『조선보물고적조사보고』의 자료들과 일치하였다. 1992년 구리문화원이 발족하면서 여기에 동참한 김민수는 아차산 일대의 보루성에 관한 학계의 공인을 받는 작업을 요청하였고, 구리문화원은 이에 적극적인 조사 작업에 착수하였다. 각 분야의 소장파 학자로 이루어진 학술조사단을 구성하였다. 이들이 1994년에 펴낸 조사보고서가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이다. 여기서 중점적인 조사는 아차산의 유적지였다. 이 조사에서도 아차산의 능선에 있는 돌무지 유구를 삼국시대의 석성으로 보는 견해와 近조선시대의 살곶이목장의 담벽으로 보는 견해가 대립되었다. 보루성에 관해서는 여기서 채집된 고구려토기들을 인정하여 고구려 유적이라고만 명명하였다. 끝내 보루 또는 보루성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1998년 구리문화원은 서울대 박물관에 용역을 주어 아차산 제4보루성을 발굴하게 이르렀다. 발굴결과 남한에서 최초로 발견된 고구려의 보루성으로 확인되었다. 그 결과물이 2000년에 발간된 『아차산 제4보루』라고 하는 발굴종합보고서이다. 이러한 결과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증표로서 국내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고무되어 재차 발굴한 곳이 망우산에 있는 시루봉 보루성이다. 이 또한 순수한 고구려의 보루성임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물이 2002년에 발간된 『아차산 시루봉 보루 발굴조사종합보고서』이다. 이렇듯 남한 내에서 고구려 유적들이 처음으로 밀집되어 나타나는 아차산 일대는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에 맞서는 남한 내의 중요한 자료로써 높이 평가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서울 지역에서도 아차산 보루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물이 2004년 『홍련봉 보루 1·2차 발굴조사 약보고』이다. 이어 2005년 『홍련봉 2보루 1차 발굴조사 약보고서』가 나왔다. 또한 구리시는 2005년에 『아차산 3보루 1차 발굴조사 약보고』를 내놓았다. 2006년 마지막으로 서울시는 『용마산 2보루 발굴조사 약보고』로 지금까지의 아차산 발굴작업을 마무리지었다. 이러한 결과로 추측하건데, 아차산 일대에 있는 보루군들은 대부분이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 아차산 일대의 문화유적 조사 현황 1. 1990년『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부록 아차산의 城圖 해설 김민수 2. 1993년『 백제의 위례성과 북한산성』부록 아차산의 城圖 내의 유적 구리문화원 3. 1994년『 한강유역에서의 삼국사의 제문제』부록 아차산 주위의 城圖 해설 구리문화원 4. 1994년『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구리문화원 학술총서1 5. 1996년『 백제 건국과정의 제문제』부록 아차산성의 유적·유물 간해 구리문화원 학술총서3 6. 1998년『서울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지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건국대 박물관·광진문화원 7. 1998년『 아차산성 기초학술조사 보고서』명지대부설 한국 건축문화 연구소·광진구 8. 2000년『 아차산성 시굴조사보고서』서울대박물관·광진구 9. 2000년『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서울대 박물관·구리문화원 10. 2000년『 구리시의 역사와 문화 지표조사보고서』서울대박물관·구리문화원 11. 2002년『 아차산 시루봉 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서울대박물관·구리문화원 12. 2004년『 홍련봉 1보루 1·2차 발굴조사 약보고』고려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13. 2005년『 홍련봉 2보루 1차 발굴조사 약보고』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14. 2005년『 아차산 3보루 1차 발굴조사 약보고』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15. 2006년『 용마산 2보루 발굴조사 약보고』서울대학교 박물관 (2) 「아차산 일대 보루군」 사적지정 현황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들이 대부분 고구려에 의하여 축조된 사실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더군다나 한강하류라는 중요한 거점에서 밀집되어 나타나는 고구려의 보루군들은 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따른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들의 발굴성과는 언론매체를 통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때마침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을 서두르는 ‘동북공정’이 진행되었다. 남한 내의 고구려의 유적·유물이 희소한 상태에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은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반가운 자료이다. 또한 국민들의 분노를 역량으로 모아 중국에 항의할 수 있는 거점이 되었다. 그 예가 아차산 기슭에 세워진 광개토대왕 동상과 그 주위의 광장이었다. 아차산은 망우산·용마산 모두를 아우르는 수도권의 명산이다. 남한강·북한강이 만나서 첫 번째 휘어지는 그 北岸에 길게 늘어져 있어서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근래에는 멧돼지가 나타날 만큼 생태계까지 잘 복원되어 있다. 이러한 아차산은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오기가 아주 좋은 산이다. 그래서 아차산은 웰빙시대의 등산로로써 또한 각광받고 있다. 이제 아차산은 수 많은 인파에 겨워 몸살을 앓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능선 상의 등산로에 위치해 있는 고구려의 보루군들의 훼손은 더더욱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보루군들의 훼손을 목격한 시민들의 질타와 언론매체의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루군들을 담당하는 각 지자체들은 까다로운 문화재법과 그 절차에 따른 보전에 한계를 느꼈다. 따라서 이를 하나로 묶어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2004년 8월 27일 행정자치부 인터넷관보를 통하여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을 사적지정하기로 예고하였다. 그리하여 같은해 10월 27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명칭으로 사적 455호로 지정되었음을 고시하였다. ☞ 아차산 일대 보루군 현황 (3)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군의 역사적 의의 1998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아차산 제4보루·시루봉보루·홍련봉보루·아차산 제3보루·용마산 제2보루들의 발굴결과 모두 고구려에 의하여 축조된 성곽임이 확인되었다. 성의 내부에는 온돌유구가 있는 건물지와 물을 담아 두는 저수시설 그리고 배수시설들이 나타나고 있다. 토기들은 음식을 만들 때에 사용하는 조리기와 식사할 때의 배식기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토기에서 글씨가 새겨진 것들도 있었다.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굴뚝을 토기로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철재류는 무기류·농기구류·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은 아차산 능선 상에 5개소가 있다. 아차산을 감싸는 첫 번째 방어선이다. 이어 용마산의 7개소의 보루와 망우산의 4개소(사적2개소)의 보루가 두 번째의 겹 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보루들의 구심점에 있는 한강 변의 홍련봉보루에서 고구려의 기와와 와당이 출토되었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들 중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보루가 홍련봉보루였다. 홍련봉보루를 구심점으로 하여 아차산 일대로 뻗어 있는 고구려의 보루군들의 편제를 어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의 보루는 능선 상에 일정한 간격을 둔 봉우리들을 보루로 선택하여 축조하였다. 그러므로써 서로가 교신할 수 있고, 유사시에는 유기적으로 작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古代史上에 웅비하였던 고구려의 기상을 되새기므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시켰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국호인 Korea(고구려)를 선양하므로써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남한 내의 역사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풀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 및 몽촌토성 서남지구 고구려 유적, 「중원고구려碑」, 진천 대모산성, 청원군 남성골산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 극히 일부분이다. 이러한 미미한 자료들을 가지고 고구려가 방대한 한반도의 중남부지역을 통치하였다는 ꡔ삼국사기ꡕ지리지의 문헌사료를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또한 한강하류 지역에서도 고구려의 보루들이 산포되어 있지 않고, 유독 아차산 지역에만 밀집되어 있는 이유도 궁금하여 진다. 필경 한강의 水運에 관계된 중간거점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육로의 연결은 없었을까. 만약에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이 육로로 자기네 나라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모든 보루가 자기네 나라가 있는 북쪽을 방어방향으로 하고 있는 것도 의아스럽다. 또한 한강 남쪽의 풍납토성의 백제시대와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시대 그리고 아차산성의 신라시대는 어떠한 시차를 두고 존재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서로가 어떠한 대립구도를 가지고 한강하류 유역에서 대치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들이 대두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한강하류 유역에서 삼국의 정세 전반을 면밀히 검토하여야 한다는 제안을 제시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특히 한강하류 유역을 장악하여 아차산 일대에 보루군을 축조한 고구려는 얼마동안 이곳에서 버티고 있었는가 하는 새로운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그에 따른 고구려의 통치는 어떠하였는가도 밝혀져야 한다.
고구려의 영역은 중국·북한·남한을 망라한 방대한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들은 서로가 정치적으로 벽을 쌓고 있어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남·북한만이라도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고구려史 복원에 힘을 합쳐야 하겠다. 그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한강하류 유역의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도 큰 틀의 고구려史에서 나름대로의 자리매김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자리매김의 과정에서 국민들의 염원을 모아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
(4) 고구려 역사에 관한 중국의 입장 한반도는 미국·러시아·중국·일본의 국경이 서로 맞물리고 있는 완충지역에 해당한다. 이러한 완충지역은 남과 북이라는 팽팽한 대립구도의 균형을 근간으로 하여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 전반이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서 한반도는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먼저 한반도의 내부에서 남과 북이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여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이와 맞물려서 한반도의 조정자를 자처하고 있는 4대 강국은 앞으로의 한반도의 정세 변화가 자국에게 유리하도록 어떠한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것인가를 골몰하고 있다. 특히 북한과 국경 전반을 맞대고 있는 중국은 역사적 관점에서부터 한반도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중국은 옛날부터 한반도를 누르고 있을 때는 번영하였다. 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 漢四郡을 둔 때가 그러하였다. 唐나라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도 그러하였다. 반대로 隋나라가 고구려를 세 차례나 침략하다가 실패하자, 대제국인 隋나라는 멸망하였다. 淸日戰爭에서 패한 淸나라 또한 그렇게 멸망하였다. 이처럼 한반도는 중국의 國運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항상 있었다.
이러한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균형은 깨어지고 있다. 깨어진 틈새로부터 뜨거운 남풍이 만주벌로 밀려 갔다.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남한으로부터의 남풍은 북한에서의 탈북러시를 부채질하고 있다. 나아가 조선족자치구까지도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 당황한 중국은 우선하여 압록강·두만강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탈북자들의 루트를 차단하려는 것이다. 조선족자치구에는 되려 漢族을 유입시키거나 면적을 넓혀서 조선족의 비율을 반 이하로 낮췄다. 남풍으로부터 흐트러질 수 있는 국경 전반의 상황을 점검하고서 집안 단속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피동적인 입장에서만 머무를 수 없었다. 한반도의 여파는 동북아뿐만이 아니라,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여러 민족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는 불씨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까지도 간섭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세로 정책을 바꿨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를 주장하여야 한다. 먼저 두 부류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고대국가의 역사를 지금의 분단 상태와 같이 두 동강을 내는 일이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를 하나의 계통으로 하여 북쪽에 두고, 마한·변한·진한의 三韓을 뭉뚱그려서 남쪽으로 밀어 내는 일이다. 그 중 북쪽의 거대한 두 묶음인 고조선과 고구려(부여·발해)가 중국의 영토에서 시작하였음을 상기시켰다. 周나라로부터 封土를 받은 箕子朝鮮과 한사군의 맨 북쪽에 있는 一郡인 현도군에서 고구려가 시작한 사실이다.
그들은 중국의 중원왕조와의 君臣관계를 맺고 책봉을 받았으므로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중원왕조에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조공을 바치면서 지방정권임을 자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중원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일정책에 의하여 흡수되었고, 고조선의 자리에는 한사군이, 고구려의 자리에는 安東都護府라는 직할지를 두었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 영역은 물론이고, 그 유민들 대부분을 흡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적게 잡아도 한사군의 一郡인 낙랑군의 남부이며, 삼국의 대립시기에 고구려의 남부인 황해도까지는 고대중국 정권의 연고권의 범위에 있게 된다. 어림잡아 지금의 북한 지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한반도가 고대국가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다. 통일신라·고려·近조선·남북한이라는 엄연한 국가적 계보가 있다. 특히 근조선 말기에 일본에 의하여 淸나라와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이라든가, 북한과 중국이 맺은 朝·中국경조약(1962년)은 중국이 인정한 최소한의 한반도 국가들의 영역이다. 그러한 한반도의 북반부를 그들이 주장한 대로 옛날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던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 뒤를 이은 통일신라·고려·근조선·남북한 모두 중국에 예속된 지방정권이어야 한다. 얼토당토 않은 모순을 없애기 위하여 중국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신라는 한반도의 남반부인 三韓지역만을 아우른 것이고, 고구려의 영토와 유민들 대부분은 중국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한다. 뒤를 이은 고려 역시 王씨 계통으로서 高씨의 계통인 고구려와는 계승관계에 있지 않다고 우긴다.
이는 거란(遼)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를 침입하여 옛 고구려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였을 때, 徐熙가 “우리는 고구려를 이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다. 너희의 서울도 옛 고구려의 땅이니 우리에게 내어 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반박한 데에서 명확히 해결된 사안이다. 하여 소손녕은 압록강 以南의 여진족을 정벌하여 그 지역 江東六州를 고려에게 되돌려 주기까지 하였다. 그뿐이랴, 중국이 자랑하는 그들의 옛날 역사책인 『後漢書』에서부터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唐書』까지에 줄곧 고구려는 동쪽의 오랑캐(東夷傳)에 편별되어 있었다. 하여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왕조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주벌의 북쪽 경계선인 遼河를 따라 천리장성을 쌓았다. 이러한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의 옛 지도에서 다같이 표시되는 서로 상반되는 방어벽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한다면, 어찌 그들의 종주국인 중원왕조를 향하여 거대한 방어벽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어려움을 요령껏 풀이하려는 움직임이 ‘一史兩用論’이라고 하는 또 다른 역사 왜곡이다. 고구려는 동북아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지금 동북아를 나누워 가지고 있는 각 나라의 비율에 따라서 고구려사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계승은 현재의 영토적 관점에서 결정되어야만이 여타의 분쟁의 소지를 없앨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제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경우에 고구려의 옛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에 대한 1순위 권리자가 된다. 뿐만 아니라 향후 그들이 한반도 깊숙히 파고들어 둥지를 틀더라도 그것은 그 시점에서 그들의 권리이며 그들의 역사가 된다. 바로 중국의 팽창정책을 떠받치는 정복사관인 것이다. 이렇듯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인식은 빼앗은 고구려의 영역을 철저히 지키려는 논리적 무장이며, 남겨진 북한에서의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간섭할 수 있다는 명분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2. 온달장군의 전사지에 대한 검토
온달장군은 『 삼국사기』온달전에만 기록되어 있다. 온달을 미천한 출신에서 평강공주를 만나 일약 대장군이 되었다. 온달이 입신양명이나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이러한 극적 상황에 감동되어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온달전은 역사적 고증을 요구 받는 과정에서 그의 전사지에 대한 견해가 다르게 주장되고 있다. 각기 다른 근거는 『삼국사기』의 아단(차)성과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을(乙)아단성에서 비롯한다. 『삼국사기』의 아단성 또는 아차성은 단(旦)과 차(且)의 구별을 확연히 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혼란이다. 이를 뚜렷하게 새겨진 「광개토대왕릉비」의 아단성(阿旦城)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할 경우에 『여지도서』의 충청북도 단양군 지경의 을아단성은 ‘을(乙)’이 ‘웃(上)’의 빌림글자로 비정되어 웃아단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강하류의 아랫 아단성과 남한강상류의 웃아단성이 서로 대응하여 있게 된다. 이에 아랫 아단성은 그대로 아단성이라고 하고, 웃아단성에게만 ‘을(乙)’의 머릿글자를 붙여 을(乙)아단성이라고 다르게 표현하여 서로 구별한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온달의 전사지를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 지경으로 보는 견해이다. 문헌적 근거는 『여지도서』에서 이 곳의 온달산성은 고구려의 부마인 온달이 쌓았다고 전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은 『증보문헌비교』·『충청도읍지』에서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삼국사기』온달전에서 그가 전사한 곳을 을아단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아단성이라고만 하였을까. 그리고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아단성을 되찾으려고 출정하였으므로 온달산성이 이에 해당한다면 고구려·신라의 유물들이 시차를 두고 출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온달산성을 발굴결과에 의하면 신라에 의하여 쌓아졌으며, 신라 계통의 유물만이 출토되었다. 온달산성은 고고학적으로 아단성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강하류와 남한강상류 사이에는 수 많은 성들이 있었을 테인데, 유독 아차산의 아단성과 단양의 온달산성 두 城만을 지목하여 아랫 아단성과 웃 아단성으로 비정한 것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온달산성 지경을 온달의 전사지로 추정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원초적인 의문들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정황에서 온달의 전사지를 찾아 낼 방법은 없을까.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였지만, 그의 시대에 전사한 것이 아니다. 장인인 평원왕이 죽고 나서 그의 맏아들인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한 다음에 아단성까지 출정하였다가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온달은 자기의 처남인 영양왕에게 한북(漢北)의 땅을 신라에게서 되찾게 하여 달라고 주청하였다. 허락을 받고 출정하면서는 계립현(雞立峴)·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한북의 땅에 관계된 곳은 아차산의 사적 아차산성 지경이다, 계립현 · 죽령 서쪽의 땅에 관계된 곳은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 지경으로 비정할 수 있다. 두 곳 중에서 어느 한 곳이 온달이 전사한 역사적 정황과 맞는 것일까. 고구려의 영양왕 때의 신라의 왕은 진평왕이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隋)제국의 세 차례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유명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도 이때의 일이다. 그래서 대제국인 수나라도 멸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고구려가 영양왕 시대에 신라를 공격한 것은 딱 한 차례 있었다.
A.D.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이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지금의 아차산의 사적 아차산성으로 밝혀졌다. 시굴조사(2000년)에서 사적 아차산성 내의 유물들이 신라의 것들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기와에 새겨진 北·漢·山의 글씨가 여럿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임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강하류까지 北進한 신라의 거점은 말할 것도 없이 사적 아차산성인 그들의 북한산성이다. 이 곳을 고구려에게 빼앗긴다면 신라는 북진의 진로가 막히는 것이다. 이에 신라의 진평왕은 1만군을 이끌고 와서 고구려군을 격퇴시켰다. 얼마나 참담한 패배였는지, 자기 나라의 ꡔ삼국사기ꡕ고구려본기에서 이때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의 패한 장수는 고승(高勝)이었다. 기록에 비추어 보건데 고승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ꡔ삼국사기ꡕ온달전에서 평강공주를 시집보내려는 가문은 상부 高씨의 집안이었다. 평강공주가 아니 가겠다고 버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왕가의 상식에 어긋난다. 더군다나 평강공주가 미천한 온달을 찾아나선 것은 더욱 그렇다. 고구려의 영양왕 시대의 온달은 신라와 싸우다가 아단(차)성 지경에서 전사하였다. 영양왕 때의 신라와의 싸움은 딱 한번 신라의 북한산성에서 있었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지금의 아차산에 있는 사적 아차산성으로 밝혀졌다. 이때 패한 고구려의 장수는 고승이었다. 평강공주의 혼처가 고씨 집안이었다. 바로 고승장군이 온달인 것이다.
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삼국사기』온달전은 위작하였을까.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에 쓴 것이 아니다. 고려시대인 A.D.1145년 정치가인 김부식 등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이 즈음 대초원에서는 몽고족이 발흥하고 있었다. 몽고족에 쫓긴 거란과 여진이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삼면의 바다는 언제 어디서나 왜구들이 출몰하여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고려가 처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훈교적 가치관의 제시가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本紀는 紀傳體로써 역사적 기술에 충실하여야 한다. 따라서 국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여백은 열전 편뿐이었다. 이에 따라 고승장군을 온달로 대치시킨다면, 미천한 사람들도 나라를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 이들에게 부마의 공명까지 곁들인다면, 이는 충성에 대한 보은의 극치이다. 『삼국사기』온달전의 찬자는 계급사회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온달전을 편별한 것은 닥쳐올 고려의 국난을 민중의 힘을 빌어서 타개하려는 의도가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3. 계백장군의 황산벌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A.D. 660년 5월 26일 김유신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왕성 경주를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6월 18일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남천정(南川停. 州)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당(唐)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13만 수군을 이끌고 서해의 덕물도(德物島. 현재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에 맞춰 신라의 태자 법민(法敏. 후에 문무왕)은 병선 100척을 이끌고 6월 21일 덕물도에 있는 소정방을 만났다. 여기서 신라군과 당 수군이 합의한 작전은 7월 10일 백제의 남(南)에서 만나기로 한 그것이었다. 이러한 보고를 덕물도에서 돌아온 태자 법민으로부터 받은 태종무열왕은 당군의 작전에 맞춰서 신라군을 출정시키라고 지시하고서, 그 자신은 남천주에서 경상북도 상주의 금돌성(今突城)으로 내려왔다. 아마도 긴 병참선을 원활히 하고, 되려 백제의 역습으로부터 신라의 서(西)변을 방비할 계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자 법민이 덕물도에서 남천주까지 돌아오는 데에는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 급히 신라군을 정비하여 출정시킨다고 하여도 이틀은 족히 걸릴 것이다. 따라서 사흘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신라군은 남은 16일의 일정을 가지고 남천주(今, 이천?)에서 백제의 도성 부여를 우회하여 그 남쪽의 黃山伐까지 진격하여야 한다. 달리 태자 법민과 김유신 등이 신라의 태종무렬왕이 머무르고 있는 今突城(今,경북상주)으로 가서 여기서 백제의 접경에 대기하고 있었던 신라군을 출정시켰다고 하여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신라와 백제와의 첫 접전은 황산벌이었고, 황산벌은 지금의 충청남도 論山지경에 있었다,라는 데에 아무런 異議가 없기 때문이다.
羅·唐의 침입을 미리 알고 백제도 방어전략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의 영토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신라의 5만 대군이 보름여의 짧은 일정으로 지금의 논산이라고 하는 황산벌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요행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신라는 백제에게 밀려서 낙동강까지 후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의 육로진격설은 검토되어야 한다. 황산벌 전투로 인하여 하루 늦게 도착한 신라군의 선봉장 김문영(金文潁)은 금강하구의 상륙지인 伎伐浦를 먼저 점령한 唐의 노여움을 사서 참살당할 뻔하였다. 이때 신라의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를 唐軍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였다. 지금까지 황산벌이라고 여겨왔던 논산과 금강하구의 기벌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두 곳 사이에는 평야지대가 펼쳐저 있어서 조금 높은 곳에서는 서로 바라볼 수 있다. 삼국말기에도 대포·포차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戰禍의 파장은 피난민이나 패잔병에 의해서도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전화에 묻혀서 살아온 두 老將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상황을 몰랐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의문들은 황산벌이 논산이 아닐 경우를 검토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실재 황산의 지명들은 경기도 하남시의 황산, 전라북도 익산시의 황산, 경상북도 경주시의 황산들이 있는 것처럼 고유한 지명이 아니다. 황산은 큰 강가의 넓은 벌판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지명으로써 지금의 둔치에 해당한다.
먼저 백제정벌의 전초기지였던 남천주는 경기도 이천에 있지 않았다. 『삼국사기』열전 김유신傳에 의하면, 첫 번째 羅唐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칠 때(A.D. 661)의 신라의 문무왕(前, 태자 법민)은 남천주에서 제반 출정준비를 서둘렀다. 두 번째 羅唐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할 때(A.D. 668)의 문무왕의 위치는 ꡔ삼국사기ꡕ열전 김인문傳에서는 북한산성에서, 같은 책 문무왕 8년 조에서는 漢城州로 되어 있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사적 아차산성으로써 그 南변의 한성(州)과는 마주하고 있으므로 같은 작전지역이다. 문제는 하나의 정벌대상인 고구려를, 한 사람이 주체인 문무왕이, 한번은 내륙의 경기도 이천에서, 또 한번은 한강하류의 강변의 한성에서 출정준비를 하였거나 출정시켰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신라의 강역에는 十停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천(?)의 南川停과 여주의 骨乃斤停은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이웃하고 있다. 더군다나 필히 있어야 할 한강하류에서의 漢城停은 없다. 바로 남천정은 그 상위편제인 六停의 하나로써 한강하류 유역에서 남·북으로 환치되었던 新州 停·(北)漢山停·南川停·(北)漢山停들 중의 남천정으로서 漢城(州)인 것이다. 여기서 船團을 구성한 신라의 水軍은 한강하류를 타고 내려와서 서해로 나아가 금강하구의 기벌포에 상륙하려고 하였다.
이에 맞선 백제의 계백장군은 한강하구의 東변의 炭峴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탄현은 경기도 고양시 高峰山城의 능선이다. 이러한 탄현의 지명은 근조선 영조 때(A.D. 1775)의 李錫禧에 의하여 편찬된 『高陽郡邑誌』에서 확인된다. 지금까지도 탄현지구·탄현SBS촬영소 등으로 그 명칭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탄현을 감싸고 있는 지금의 일산 신도시 일대는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의 皆伯縣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지명으로 한 것은 광개토대왕·장수왕 때의 南征을 돋보이게 하려는 편찬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의 안장왕은 이곳을 빼앗기 위하여 漢氏 미녀의 설화를 남길 만큼 끈질겼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이로 보아서 개백현은 백제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러한 개백현과 계백장군은 서로 같은 명칭이다. 계백장군의 이름은 『堦伯(『삼국사기』본기)·階伯(『삼국사기』열전)·皆伯(『삼국사기』의자왕 조)·偕伯(『삼국유사』태종춘추공 조)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다. 堦·階·皆·偕는 우리말에서는 조금씩 다름이 있지마는, 중국의 두 가지 발음표기에서는 각각 ‘chieh(웨이드)’와 ‘jie(병음)’로 모두 같다. 개백현의 장군이 계(개)백인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계백軍이 신라군과 맞닥뜨린 곳은 탄현이 아니고 황산벌이었다. 탄현은 고봉산성의 능선으로써 한강하구의 東변을 南·北으로 차단할 수 있지만, 한강의 水路를 막기에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백제의 예상과는 달리 신라의 水軍은 탄현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함선으로 한강하구를 빠져 나가려고 하였다. 다급해진 계백장군은 탄현을 버리고 한강하구의 강변으로 내려와서 신라의 水軍을 직접 막았다. 어쩔 수 없이 신라의 水軍은 下船하여 계백軍과 五戰을 벌린 강변이 黃山之野로써 흔히 황산벌이라고 부른다.
『 삼국유사』 (長)春郞·罷郞 조에 의하면, 두 화랑은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라고 하였다. 태종무렬왕은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장의사라는 절(寺)을 짓게 하였다. 절을 지을 만큼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두 화랑은 김유신의 조카인 盤屈과 官昌이다.
이러한 장의사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지 않다. 서울 종로구 세검정초등학교 내에 지어져 있었다. 近조선 때(A.D. 1506)의 연산군이 이곳까지 와서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저녁 무렵 장의사에서 들려오는 타종소리가 유흥을 깬다고 하여 절을 헐게 하였다. 다행히 절의 깃발을 세웠던 「장의사지당간지주」는 땅에 박혀 있는 채로 보전되었다. 지금은 국가지정 보물235호로 보호받고 있다. 바로 황산벌전투가 한강하구에 있었음을 증거하는 불멸의 증표이다.
맺는 말
아차산은 한강하류 위쪽의 北岸에 가로놓여 있어서 水運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그 남쪽의 충적평야를 보호하는 자연방어선이었다. 따라서 그 관방체제를 관장하였던 아차(단)성은 삼국시대의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백제의 책계왕 조,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 장수왕 조, 그리고 열전 온달傳에서이다. 이중에서 온달의 전사지에 대하여서만 다른 견해가 있었다. 본고는 온달의 전사한 시기의 정황을 토대로 하여 그가 전사한 곳이 한강하류의 아차산 지경이었음을 밝혔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루군이 유독 아차산 일대에만 집중적으로 축조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학계는 어떠한 결론도 도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古代史上에서의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에 관한 한 水運의 이용에 관한 검토가 우선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곁들여서 고구려의 한강하류 유역의 통치방식도 새롭게 정립하여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대하여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교육의 산실로 아차산은 활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사적 아차산성은 문헌사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北漢山城일 가능성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사적 아차산성은 시굴조사 결과 北·漢·山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명문기와편들이 여럿 채집되므로써 다시 확인되었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A.D.668년에 20만 대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전진기지였다. 그렇다면, 그 이전(A.D.660)에 백제를 정벌한 신라군의 출정地도 신라의 북한산성(사적,아차산성)일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에서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黃山의 지명은 없다. ‘黃等山也’郡이 있을 뿐이다. 되려 황산은 경주의 兄山江, 익산시의 錦江, 하남시의 漢江 등 큰 강변의 고수부지에 해당한다. 신라軍이 비켜간 炭峴도 한강하구에 있다. 이곳은 『삼국사기』지리지의 皆伯縣이다. 탄현을 비켜서 함선으로 한강하구를 빠져서 금강(伎伐浦)으로 나가려는 신라水軍을 한강하구의 벌판인 황산에서 막은 개백현의 장군이 계(개)백장군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에서 황산벌에서 전사한 반굴·관창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장의사라는 절(寺)을 짓게 하였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장의사의 터에 남아 있는 보물 235호인 「장의사지 당간지주」는 논산에 있지 않고, 서울 종로구 세검정 초등학교 내에 보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아차산에 관계된 여러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어서 古代史 복원에 힘써야 하겠다. 이러한 작업은 한강의 옛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며, 나아가 민족의 정체성을 드높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
|
|
|
기사입력: 2006/12/11 [19:17] ⓒ 디지털광진 |
|
|
- 김종윤 2014/05/29 [13:49] 수정 | 삭제
- 박상범 2013/05/28 [10:23] 수정 | 삭제
- 이기오 2011/05/30 [02:31] 수정 | 삭제
- 이기오 2011/05/30 [01:48] 수정 | 삭제
- 박하사탕 2010/05/16 [11:08] 수정 | 삭제
- 이병수 2008/03/06 [06:38] 수정 | 삭제
- 정지현 2007/04/16 [13:31] 수정 | 삭제
- 초동 2006/12/17 [14:10] 수정 | 삭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