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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대하여.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 특별기고. 아차산 보루성 정비 시급
 
향토사학자 김민수   기사입력  2004/01/25 [15:02]

▲고구려의 유적인 아차산 4보루성 복원 조감도(구리시 홈페이지)     ©디지털광진

 중국은 무려 16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큰 나라이다. 이와 같은 중국이 있기까지 그들은 알게 모르게 그 주변의 이웃나라 또는 다른 민족들을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켜 나아갔다. 넓힌 영토에 있는 다른 민족들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도 뒤따랐다. 그럼으로써 넓힌 국경선을 단단히 묶어 둘 수 있고, 나아가 이웃한 나라들과의 영토분쟁의 빌미를 미리 없앨 수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웃나라를 다시 침략하거나 간섭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두자는 속셈이었다.

 이러한 문화사업을 진행시켜 나가는 곳이 중국사회과학원 밑에 있는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이라는 학술단체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었던 요녕·길림·흑룡의 동북3성에 있는 다른 민족의 역사·문화를 자기네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대규모의 역사·문화사업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한다. 동북공정의 주된 목적은 동북아에서 역사의 실체로써 지금까지도 국가의 면모를 당당히 이어온 한반도를 겨냥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독 중국이 우리의 고구려 역사에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옛날부터 우리나라를 누르고 있을때는 번영하였다.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 한사군(漢四郡)을 둔 때가 그러하였다. 당(唐)나라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도 그러하였다. 반대로 수(隋)나라가 고구려를 세 차례나 침략하였다가 실패하자, 대제국인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淸)나라 또한 그렇게 멸망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중국의 국운(國運)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항상 있었다. 지금의 한반도만 두고 보더라도 미국·러시아·중국·일본의 국경이 서로 맞물릴 수 있는 완충지역에 해당한다.

 또 한가지는 지금의 현실적인 문제이다.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북한은 침몰하고 있다. 중국의 맹방으로써 동북아에서 든든히 버티어 주고 있었던 북한의 약화는, 남한을 주축으로 한 한반도 통일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분명 통일된 한반도는 중국과의 영토분쟁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소지는 지금의 중국 영토(주로 동북3성)에서 흥기(興起)하였던 고조선·부여·고구려의 역사이다. 역사적 연고는 이에 따른 옛 영토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옛 역사의 복원은 남·북한 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본·러시아의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더군다나 중국에 살고 있는 교포(중국의 조선족)들도 북한과의 관계를 끊고, 경제·정치적으로 발전한 남한을 더 동경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북한 주민들에게까지 미쳐서 남한으로 가려는 탈북사태가 러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동요는 중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선 중국은 조선족 자치구에 한족(漢族.중국민족)을 유입시키거나 면적을 넓혀서 조선족의 비율을 반 이하로 낮췄다. 이것만 보더라도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을 두고서, 명분으로 내건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허구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기존의 중국민족(漢族)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분해·융화시켜 나아가는 중화주의(中華主義)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여기에서의 중점사업은 한반도와 중국교포(조선족)를 겨냥한 동북공정이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진행시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옛날 역사책에서부터 줄곧 그들의 이웃나라로 인정하여 온 고구려의 역사가 그것이다. 고구려는 700여 년을 이어온 정통국가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맥을 이어온 남·북한이라는 두 나라가 엄연히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다. 남·북한 공히 대외적인 국호의 명칭은 고구려를 표상한 Korea 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두 개의 고구려 문화권을 우선 구분하였다.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중국 내에 있는 어떠한 종족의 문화도 중국의 문화라는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선언한 것이다.

▲길림성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사진출처-국가문화유산종합서비스 홈페이지)     ©디지털광진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광개토왕 이전의 집안의 고구려 문화와 그의 아들 장수왕이 옮긴 대동강변 평양의 고구려 문화로 나눈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문화적으로 아버지(광개토왕)와 아들(장수왕)을 나눌 수 없으므로 아예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역사라는 얼토당토않은 역사 왜곡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구려에 대한 영토주권은 물론이고 역사주권까지도 중국의 것이라는 억지이다. 이것은 압록강 국경선의 방어 입장을 넘어서서 북한에 어떠한 사변이 일어난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은 북한에 있는 세계유산(문화·자연·복합)을 유네스코 산하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 ; WHC)에 등재를 시키려는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났다. 남한은 이미 1995년 제19차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와 대장경, 종묘 등이 우선 등재되었고, 이후에 수원 화성, 창덕궁, 고인돌, 경주역사지구가 추가로 등재돼 모두 7점이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으로 세계유산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를 딱히 여긴 유네스코는 북한 내에 있는 세계유산이 될만한 것들을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할 것을 권고하였다. 북한은 이에 따라 문화유산 부문에서 고구려의 옛 무덤 63기(16기는 벽화고분)·개성역사지구·평양역사지구 등 3점을, 그리고 자연유산에서 칠보산과 구장지역 동굴 등 2점을, 복합문화유산으로는 금강산 관련 유적과 묘향산 관련 유적 2점 등 총 7점을 세계유산위원회에 잠정목록으로 신청하였다.

 그러나 2001년도부터는 잠정목록 중에서 하나만 골라서 등재를 신청할 수 있도록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규정이 바뀌었다. 바뀐 규정에 따라서 북한은 문화유산 부문의 고구려 옛 무덤 63기를 네 구역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하나로 묶어서 'Complex of the Koguryo Tombs'라는 공식명칭으로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를 추진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중국 측은 당황했다. 북한이 단독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인정받을 경우에, 그들이 진행시켜 나아가는 고구려 역사 왜곡은 치명타를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유적과 그 이남의 북한 내의 고구려 유적을 묶어서 중국·북한의 공동명의로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를 신청할 것을 북한측에 제의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중국측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고, 2002년 1월 25일 등재신청을 마쳤다.

 다급해진 중국 측은 자기네의 영토에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들을 정비·복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003년 2월에 '고구려왕성, 왕릉급귀족묘장'이라는 주제로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를 신청하였다. 내용은 고구려의 옛 무덤뿐만 아니라 오녀산성과 국내성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석까지 하나로 묶어서 등재를 신청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의 문화유산 부문의 등재결정은 같은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 Sites ; ICOMOS)로부터 자문을 받아서 판단해왔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등재신청의 순차에 따라서 먼저 북한이 등재를 신청한 고구려의 옛 무덤들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나서 결정기관인 세계유산위원회에 고구려의 옛 무덤들에 대하여 등재를 보류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 이유는 실질적인 평가를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의 이유를 들고 있다. 또한 역사적인 고증이 미흡한 것도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조물 중에는 콘크리트로 덧씌우기를 한 것들도 있을 만큼 대체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2003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북한이 등재를 신청한 고구려의 옛 무덤들을 일단 등재에서 보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북한 내의 고구려의 옛 무덤을 조사하기 위하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온 일본학자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에 의하면, 고구려의 옛 무덤들이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결정을 받을 수 없다는 지적들은 같이 조사원으로 활동한 중국의 학자에 의하여 제기되었다고 한다.(대한문화재신문 제3호, 2004.1.1)
중국이 자기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을 신청한 2003년 2월 이후 다섯 달만에 북한내의 고구려의 옛 무덤들은 등재 보류의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 점이 중국 측이 북한 내의 고구려 옛 무덤들을 북한 단독으로 등재시키려는 것을 방해하여 막았다는 정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자기네의 것으로 왜곡시키고, 나아가 세계에서까지 공인 받으려는 「동북공정」의 실상은 우리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러한 국민들의 분노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있는 프랑스의 사무처로 빗발치는 항의와 더불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임을 세세히 알렸다. 또한 중국의 패권주의적 발상에 우려를 나타내는 러시아·일본의 학자들까지도 우리 국민의 분노에 동참하였다. 결국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2004년 1월 16일 북한과 중국에 나뉘어져 있는 유적들에 대하여 각각 따로 등재하면 좋겠다는 권고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권고안이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는 2004년 6월 중국의 쑤저우(蘇州)에서 열리는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의 총회에서 결정될 사항이다. 그러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권고안은 지금까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이의 없이 받아들여진 전례를 볼 때 중국내의 고구려의 유적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결국 중국내의 고구려의 유적은 등재되고 북한내의 고구려의 유적은 탈락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이뤄진다고 해도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으로만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북한의 것으로 두 동강이 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북한이 중국의 공동 등재를 거부하였던 처음의 의도처럼 우리만이 고구려의 유적을 독점하기는 힘들다. 바꾸어 생각하더라도 중국이 자기네의 영토 안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을 자기네의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의 것이라고 하여 선뜻 내어줄 리는 만무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처방안은 우리의 역사의 실체로써 고구려를 굳건히 세우는 것이다. '중국은 그들의 옛날 역사책에서부터 고구려를 동쪽에 있는 오랑캐 편(東夷傳)에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썼다. 이러한 고구려가 남·북한 공히 대외적 국호로 쓰이는 Korea이다.

 이제 늦었다고 하지만 이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이 있듯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정체성을 드높이기 위하여 옛날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차곡차곡 정돈된 논리를 가지고 「동북공정」의 허실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나아가 민족의 정체성의 깃발을 높이 세워야 한다. 또한 북한이 힘에 겨워 못 다한 문화유적들의 정비·복원에 협력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한 내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들 중에서 아차산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15개의 보루성은 대부분 순수한 고구려의 유적지이다. 이들을 차곡차곡 정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킴으로써 고구려의 문화적 반경이 한반도 깊숙이 남겨져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이는 반대로 고구려의 북진(北進)의 반경을 가늠할 수 있는 방증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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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1/25 [15:02]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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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양연 2014/12/09 [16:43] 수정 | 삭제
  • 태왕 폐하 만세! 대고구려 제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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