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온달은 보잘 것 없는 처지에서 몸을 일으켜 고구려의 큰 장수가 되신 분이다. 평강 공주를 만나서 낮과 밤을 가려 무술과 학문을 익혀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 서민들에게는 누구나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평강공주는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나선 용감한 여성이다, 바보온달을 만나서 오순도순 숨어서 산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온달을 가르치고 떠받쳐서 고구려의 큰 벼슬(大兄)을 얻게 하였다. 그래서 평강공주는 후세 사람들에게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었다.
사랑하는 온달장군이 이곳 아차산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비보를 들은 평강공주는 한 걸음에 평양에서 아차산까지 내달아 왔다. 움직이지 않는 온달장군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저가 왔거늘 함께 돌아가십시다.” 라고 말하자, 온달장군의 관이 움직였다. 평강공주의 뜨거운 사랑이 온달장군의 관을 움직인 것이다. 이렇듯 평강공주는 사랑이 넘치는 여성이었다.
이러한 온달장군이 죽은 곳은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온달산성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급박한 전장터까지 평강공주가 내달아올 수 있는 방법은, 배를 타고 서해로 내려와 한강으로 들어오는 길 뿐이다. 신라군들이 우글거리는 온달산성까지 가려면 한 달도 더 걸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군이 살았던 흔적은 온달산성이나 그 주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서울의 아차산성 주위에는 무려 20여 개소의 고구려 보루성들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16개소를 추려서 사적 455호 아차산보루군으로 지정하였다. 고구려의 군사들이 한강을 지키기 위하여 아차산의 능선에 주둔하였던 작은 성들의 군락이다. 온달장군이 그토록 신라로부터 되찾으려 애썼던 한강 북쪽의 땅이 바로 고구려의 유물•유적이 증거하는 아차산보루군이다.
▲ 광진구의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아차산성 망대지를 둘러보고 있다.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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