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구의 향토사학자로 지난 30여년간 한강과 아차산을 중심으로 고대 삼국시대 역사를 연구하며 활발한 논술활동을 펼쳐온 김민수 선생이 기존에 발표했던 논문을 보강해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이다」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이다」에는 아차성(백제)․남평양(고구려)․북한산성(신라)의 위치, 온달傳의 역사적 실체, 북한산주와 남천주와의 관계,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로의 재검토 등 아차산과 아차산성을 둘러싼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편집자 주)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이다.
-향토사학자 김민수-
▲아차산성 망대지를 둘러보고 있는 김민수 향토사학자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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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고대 삼국시대 아차산의 지정학정위치와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조명한 논문 「아차산(峨嵯山)에서의 고대사(古代史)의 제문제(諸問題)」 로 전국향토문화연구발표회에서 영예의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민수 선생은 최근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이다」 에
사적 234호 아차산성은 명칭이 그러하듯이 백제의 아차성(阿且城)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 김유신 전의 기록으로 본다면 신라의 북한산성이다. 이유는 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인 661년에 말갈과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협공하였다. 고구려는 수군(水軍)으로 와서 서쪽에, 말갈군은 기병(騎兵)으로 와서 동쪽에서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러한 전황을 연출할 수 있는 곳은 한강하류 북변의 사적 아차산성에서만이 가능하다. 668년에 신라와 당나라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도 신라는 그들의 북한산성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까지 진격하였다. 이러한 상황 또한 지금의 사적 아차산성에서만이 가능하다.
근래 2016년에 한강문화재연구원이 아차산성 망대지 일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고 쓰여진 기와편을 채집하였다. 또한 채집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신라의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돌도 쌓은 성벽도 신라가 쌓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고학적인 관점에서도 사적 아차산성은 백제의 아차성이 아니라 신라의 북한산성임이 확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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