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백제의 阿旦城은 어디에 있었을까?
아차산성 보수정비 위한 학술회의 열려. 아단성 위치 집중 토론.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3/05/13 [20:59]
과거 삼국시대 전략 요충지였던 아차산의 아차산성 기초조사를 위한 학술회의 '아차산성과 삼국의 상호관계'가 10일 오후 한성백제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아차산 일대 및 아차산성의 역사적인 의미와 이와 관련한 학계의 연구성과 발표를 위한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특히 그 동안 아차산성으로 비정되었던 백제 아단성의 실제 위치가 어디인지를 놓고 학자들간에 치열한 토론이 전개되어 관심을 모았다.
 
▲ 아차산성 보수정비를 위한 학술회의가 10일 한성백제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학술회의 종합토론 모습     © 디지털광진

 
'아차산성과 삼국의 상호관계' 주제로 학술회의, 아단성 위치에 관심 집중
이날 토론회는 광진구(구청장 김기동)가 주최하고 가경고고학연구소(소장 오규진)와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담당 박대재 교수)가 주관했으며, 문화재청과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 한강문화재연구원이 후원했다. 학술대회는 10일 오후 2시부터 4시간 동안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위치한 한성백제박물관 강당에서 진행됐으며 학계 전문가 및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 학생 등이 함께 했고 광진구 정윤택 부구청장과 구청 관계공무원 등도 참석해 토론회를 지켜보았다. 
 
 현재 광진구는 지난해 12월부터 국시비를 포함해 총 1억원을 투입해 한강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아차산성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을 시행 중에 있으며, 이번 학술대회는 아차산성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과 관련된 중간성과 발표와 함께 아차산성의 역사적인 의미와 고고학적인 조사 및 연구 성과에 대한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총 5명이 주제발표를 한 이날 토론에서는 삼국시대를 포함한 과거 한반도의 역사에서 아차산성을 비롯한 아차산 일대의 전략적 위치, 역사 등에 대한 학자들의 발제가 진행되었는데 특히 관심이 집중된 것은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백제 아단성(또는 아차성)의 위치가 현재의 아차산성인지였다.
 
백제의 아단성(阿旦城), 또는 아차성(阿且城)은 삼국사기에 '백제 책계왕 원년(286년)에 아단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광개토태왕비에 영락 6년(396년) 고구려가 공취한 58성에 아단성이 포함돼 있다. 또한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했을 때 개로왕을 아차성 아래에서 참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난 1999년 시굴조사 이전까지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비에 등장하는 아단성(또는 아차성)은 현재의 아차산성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지만 시굴조사 결과 아차산성에서 신라의 유물만 발견되고 '北, 漢, 山' 등의 글씨가 발견되어 현재의 아차산성은 7세기 당시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 학자들은 '그럼에도 아단성이 아차산성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이 추정이 맞으려면 현재의 아차산성에서 백제의 유물이나 백제의 축성 흔적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광진구의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씨는 적극적으로 '현재의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이며 아단성은 그보다 남쪽인 현 배수지운동장이다'는 주장을 내놓아 학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는 등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 아단성의 위치는 2000년대 들어 고대 역사학계의 과제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아단성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 다수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아단성 위치에 대한 논쟁에 참여해 이날 최고의 토론주제가 되었다.
 
▲ 제1주제발표 중 아차산성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는 최종택 교수. 사진속의 한강개발 전 한강일대 사진 가운데가 아차산이며 거대한 모래톱 등 현재와는 확연하게 다른 한강의 모습이 보인다.     © 디지털광진

 
5명의 역사학자 아차산성관련 주제발표,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
먼저 '아차산성에 대한 고고학 조사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주제발표에 나선 고려대학교 최종택 교수는 아차산성이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1994년 지표조사, 1996년 보수공사 0및 1997년 수습발굴조사, 1999년 시굴조사 과정 등을 통해 조사된 아차산성의 구조와 출토유물 등에 대해 설명한 후 "아차산성은 문헌과 금석문 기록에 등장하는 아단성(阿旦城)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사기에 백제 책계왕 원년에 아단성을 고쳐 쌓았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따르면 아차산성은 286년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늦어도 396년 이전에 아차산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은 명확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차산성에 대한 조사를 통해 이 성이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고 고구려 유구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백제의 아단성이 현재의 아차산성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백제나 고구려의 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힌 후 "아차산성에서 발굴된 명문기와 등을 볼 때 현재의 아차산성은 7세기 당시 신라의 북한산성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2주제인 '아차산성 주변의 고대 성곽과 교통로'를 발표한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은 "아차산성과 그 주변 지역 일대는 한반도의 간선교통축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삼국시대 삼국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차산일대는 한강 이북 임진강 이남 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고구려가 보루군을 설치하였던 이유도 이와 관련해 설명해야 한다. 특히 해상교통 요지로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이 합류되는 한강하구와 경기만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 통로가 되는 아차산일대를 차지해야 했고 이 때문에 삼국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며 "서울분지 일대는 사방에서 교통로가 교차하는 결절지가 되며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볼때는 X자형 육상교통축이 만나는 곳으로 서울지역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교통의 요지는 아차산 주변 지역이다."며 아차산 일대가 과거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가 된 배경을 설명했다.
 
▲ 서영일 한백문화연구재연구원 서영일 씨가 아차산성 주변의 고대성곽과 교통로 주제발표 중 고구려보루및 성곽분포도를 설명하고 있다. 붉은선과 초록선이 만나는 곳이 아차산일대다.     © 디지털광진

 
제3주제인 '백제 한성도읍기의 도성체계와 아차산성'을 발표한 김기섭 한성백제박물관 전시기획과장은 "백제 도읍인 한성의 북성은 풍납토성이며 남성(왕성)은 몽촌토성이라 생각한다."며 "아차산은 백제 한성의 핵심인 풍납토성에서 바로 한강 건너편에 있다. 그러므로 아차산 줄기에 고구려보루와 아차산성이 위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주장했다. 이어 역사에 나오는 아차산성관련 기록들을 설명한 후 "근래 아차산성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뒤 쌓은 신라산성이라는 시굴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성벽 다짐층에서 채취한 탄화물의 방사성 탄소연대는 6세기 후반-7세기 전엽에 해당했다고 한다. 조사결과에 따른다면 백제사람들은 도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 건너편 산에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지냈던 셈인데다 각종 기록 속의 백제 아차성 또는 아단성은 지금의 아차산성과 다른 곳이라고 해야하기에 뜻밖이다. 개로왕이 끌려가 죽은 아차성 아래는 아차산 일대의 정황과 들어맞는다. 지점에 따라 성벽축조시기가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제4주제 '아차산성을 둘러싼 삼국의 역관계'를 발표한 국민대학교 장창은 교수는 삼국사기, 감국사절요, 동국통람, 동사강목 등에 나타난 아차성과 아단성의 명칭을 분석한 후 "예전에는 백제의 아단성과 아차산성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짙었지만 시굴조사 결과 아차산성은 신라성으로 밝혀졌다. 그렇지만 향후 추가 발굴조사에서 백제의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혹시라도 지금의 아차산성이 아닌 다른 곳에 백제의 아단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문종실록,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등에 따르면 아차산에는 광진성 내지 양진고성으로 불리는 성이 있었고 아차산 동쪽의 벼랑에서 한강을 굽어보며 강 건너의 풍납토성과 마주보고 있었다는 설명이 있다. 이를 볼 때 양진성을 백제의 아단성, 지금의 아차산성에 지정하였고 필자도 이러한 주장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차산성에서 백제 아단성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여전한 의문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장 교수는 "이와 관련해 광진구 김민수 향토사학자는 대동여지도의 아차산고성을 아차산성으로, 양진성을 백제의 아단성으로 비정했고 아단성의 유지로 지금의 워커힐고개일대를 주목했다.(김민수 선생은 1999년 논문에서 워커힐고개를 아단성 위치로 비정했지만 최근 논문에서는 구의동태봉유적지, 지금의 배수지운동장을 아단성이 있던 곳으로 비정하고 있다-편집자 주) 그는 이곳에서 석성의 기단부에 해당하는 성열을 확인했다고 한다."며 김민수 씨의 학설을 소개한 후 "아단성의 위치에 대한 추적의 단서는 아차산성의 전면발굴을 비롯한 고고학적 성과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제5주제인 '아차산성 종합정비계획 수립 및 활용방안 검토' 주제발표를 한 한강문화재연구원 오승환 연구기획실장은 광진구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 12월부터 수행하고 있는 '아차산성 종합정비계획' 용역사업 내용에 대해 설명하며 "아차산성은 전체 112,219㎡ 중 (주)워커힐이 85%를 소유하고 있고 국가가 11%, 개인 및 문중이 4%를 소유하고 있다. 식생현황은 24개 나무군이 있지만 보호수는 없다. 지표조사결과 복원된 서북측 구간 67m와 일부 훼손된 남동쪽 곡성부 일대 200m를 제외하면 74%인 776m 구간은 대체로 잔존상태가 양호했다. 성내부에는 건물지, 연지, 우물,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건물지가 유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며 조사결과를 밝혔다.
 
이어 오 실장은 "향후 종합정비계획은 가치보존을 최우선으로 하고 명확한 정비목표를 수립해야 한다. 또한 현실성있는 방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활용방안은 아차산인근에 박물관을 건립해 문화관광자원 활용의 중심역할을 부여하고 아차산 전체 역사유적지로 인식하여 관리계획을 수립하여 지역의 다양한 역사, 문화 관광자원을 연계 결합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며, 주민이 참여하는 체험관광자원으로의 활용을 기본방향으로 한다."며 아차산성의 활용의 기본방향을 제안했다.
 
▲ 한강문화재연구원 오승환 실장이 아차산성의 보전과 활용에 대해 용역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디지털광진

 
주제발표에 이어 한국고대학회 회장인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정운용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종합토론에서는 각 발제문에 대한 토론자들의 지정토론이 있었다. 지정토론자는 토지주택박물관 심광주 관장, 가경고고학연구소 이판섭, 고려대 박현숙 교수, 세종대 박물관 황보경, 가경고고학 연구소 최병화 씨가 맡았다.
 
종합토론에서도 백제의 아단성이 현재의 아차산성인지에 대한 질문과 의견발표가 계속이어지는 등 '백제 아단성'의 위치는 이날 학술회의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다할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향후 아차산성의 전면적인 발굴조사 등을 거친 후 다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대부분의 토론자들이 의견을 같이했다. 또한 '아단성은 아차산성과 다른 곳에 있었다는 김민수 향토사학자의 의견 등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돼 관심을 모았다.
 
한편, 광진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종합정비계획 수립용역을 8월 중에 완료하고, 이를 바탕으로 2014년도부터 연차적으로 체계적인 보수정비와 이를 위한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광진구는 아차산성이 사적234호로 지정된 1973년 5월 25일을 기념해 5월 25일을 구민의 날로 정할 정도로 아차산성은 광진구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고구려를 상징하는 보루성들과 아직 위치가 확인되지는 않고 있지만 아차산 일대 어딘가에 존재했을 백제의 아단성(아차성)과 더불어 아차산 일대가 삼국의 치열했던 영토다툼의 현장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차산성이 현재 건립이 논의되고 있는 국립고구려박물관 등과 더불어 광진구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향후 한국고대사와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속적인 관심이 모아질 전망이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3/05/13 [20:59]   ⓒ 디지털광진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